[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남원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야금 연주자, 이민영의 독주회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얼마 전 작고한 백인영 명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수제자이며 국악의 정통과정을 밟은 후에 국립 음악기관의 연주단원, 학교의 가야금 지도강사, 가야금실내악단 예랑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 2000년도 초에 KBS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을 시작으로 신영희 소리인생 50년 발표회 예랑창작발표회 등 수많은 무대에서 독주나 협연자로 활동해 왔다. 특히 18현 가야금 산조를 초연함으로 해서 국악계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12줄 전용의 산조 음악을 18현 가야금으로 탔다고 하는 점은 단지 악기를 바꾼 단순한 작업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음역이 확대됨에 따라 다양한 음색이나 연주법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다른 악기로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어려운 작업이란 이야기, 그래서 아직까지도 18현으로 산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민영은 12현의 산조가야금으로 연주해오던 산조를 18현 가야금으로 초연하면서 극찬을 받았다. 그 이후 김계옥 작품 발표회에서는 25현 가야금으로 북한의 작품인 눈이 내린다 를
[한국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 이어 최근순 명창의 12좌창 발표회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이번에 그는 보다 원숙해진 소리로 완창의 무대에 재도전 하게 되었다는 점, 경기 12좌창은 한곡 한곡이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곡조들이며 단조롭게 반복되는 6박형 도드리 장단이지만, 창법이나 시김새가 다양하다는 점, 그러면서도 태도, 노랫말의 발음이나 의미의 전달이 부담스럽고 즉흥성이 용납되지 않는 까다로운 조건의 노래라는 점, 관중의 입장에서는 느리며 단조로운 가락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이 발표회를 가로막는 요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최근순은 노래를 잘 부르지만,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스스로 즐거워하나 힘들고 어려운 노래로는 무엇보다도 12좌창을 꼽고 있다는 점, 잡가라는 이름은 소위 양반들이 부르던 정가(正歌)에 대한 대칭 개념에서 붙여진 명칭이란 점, 신분의 구분이 사라진 현대에 와서도 정가니 잡가니 하는 구분은 맞지도 않으며 특히 음악적 분위기나 호칭의 의미면에서 잡가란 말은 옳지 못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렇다면 잡가란 어떤 노래인가? 잡가라는 명칭에서 잡(雜)의 의미는 순수한 것이 아닌, 잡스러운 것, 뭔가 뒤섞여 있는 것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젊은 소리꾼 조정란이 평택에서 국악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몇몇 동인들과 함께 선대 음악인들이 이어준 전통음악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여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려는 의식 있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경하, 이현숙, 박미예, 정덕근 등과 함께움Art 의 창단공연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소규모 활동은 지방을 근거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 창단공연에는 소리꾼 오정혜의 사회로 길굿과 비나리, 승무와 단가, 신영희 명창의 판소리, 대금연주와 장고춤, 단막창극 등이 소개되었다는 이야기,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지역민들을 화합의 장으로 안내하게 되고, 애향심을 키우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는 이야기,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하여 마을축제로 발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격려의 뜻을 소개하였다. 이번 주에는 오는 11월 22일 경기도 국악당에서 12좌창 전곡을 발표하는 최근순 명창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최근순 명창은 10여 년 전, 서울의 국립극장에서 12좌창의 완창무대를 가진바 있다. 그런데 그 때보다는 성숙되고, 원숙해진 소리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까지 경기소리의 전설, 묵계월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잡가란 잡스런 노래가 아니라 한권 책속에 여러 종류의 노래들이 잡거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부터 묵계월의 최초 스승 주수봉이 묵계월의 소질을 보고 더 큰 선생인 최정식에게 보냈다는 이야기, 연습이 생활이고 생활이 곧 연습일 정도로 하루종일 소리만 하면서 지냈다는 이야기, 이문원에게 배운 송서를 유창, 박윤정 등 후진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어서 많은 공연과 전수교육으로 인해 경기민요의 활성화에 이바지했다는 이야기, 경기민요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되면서 안비취, 이은주와 함께 예능보유자에 올랐다는 이야기, 나이가 들어 스스로 명예보유자로 물러 앉았다는 이야기, 제자들에게 외양을 화려하게 가꾸기 보다는 발성이나 자세, 등 기본기에 충실하도록 가르쳤고, 특히 말을 하기 전에 항상 바를 正을 그린다음, 입을 열라는 충고를 했다는 이야기, UCLA 한국음악과가 폐과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0만원을 선뜻 쾌척했다는 미담 등을 소개하였다. 그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90평생 소릿길을 살아오면서 배고픈 설움과 소릿 광대의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이야기는 묵계월 명창이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자리를 스스로 명퇴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는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10여 년 전, 어느 날 필자에게 밤새 써 온 글을 열어 보이면서 교정을 부탁하였다는 이야기, 구구절절이 경기민요를 생각하는 내용, 앞으로의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기에 예능보유자 자리를 물러나겠다는 명퇴 청원서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방일영 국악상을 수상한 직후, 미국의 UCLA 민족음악대학 한국음악과가 폐과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의 나라에서 우리 한국의 음악을 심는 일에 동참 해야겠다는 생각에 2,000만원을 선뜻 한국음악과에 쾌척하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고마운 일이다. 남을 돕는다는 일이 내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다행한 것은 LA 현지의 교민들이 중심이 되어 모금운동을 펼치었고, 이에 따라 독지가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국내에서도 한국음악과에 대한 관심이나 후원이 이루어져 일단 급한 불은 끈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 묵계월은 왜소(矮小)한 용모에 외양을 가꾸지 않아 목소리로만 만나던 사람들은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TV가 없던 시절 방송국 직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 난감해 하였다는 이야기, 민요를 부르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보낸 지난 날들의 보상으로 세종상을 비롯하여 국내의 큰 상을 받았고, 1974년에는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의 소리에는 강약과 명암의 대비가 분명하고, 힘을 바탕으로 하는 역동미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 다양한 창법이나 시김새를 동반하는 선율선에서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의 흐름이 남다르다는 점, 외양(外樣)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즉흥적인 표현을 강조하기보다는 사설의 정확한 발음이나 발성 등의 기본기를 강조하였다는 점, 이러한 음악적 태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리고 오뉴월 모닥불도 쬐다 물러서면 섭섭한 법인데, 평생 지켜갈 수 있는 예능보유자의 명예를 스스로 내려놓은 아름다운 선례를 남긴 이야기 등도 하였다. 그렇다. 90이 넘고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워도 가족을 비롯한 주위사람들의 만류로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 선생이 대명창이면서도 항상 연습시간을 충실히 지켰고,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 목을 풀고 있어서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 자기의 주장이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넓은 마음씨나 그 겸손한 태도가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그는 1965년도부터 각종 기획 공연들을 통해 경서도 소리의 높은 예술성을 발휘해 왔으며 이러한 활동들이 쌓이고 쌓여 경서도 소리의 저변을 확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민요 전공자들이 생겨나면서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대도시의 문화원, 또는 사회단체, 초등학교를 비롯한 중, 고등학교에 국악강사가 파견되어 일선학교에서의 국악교육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묵계월의 제자들 가운데 임정란, 최근순, 유창 등은 경서도 소리극(京西道唱劇)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여 문화계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묵계월이 남기고 간 업적은 소리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공연, 소리극, 교육, 학문 등 각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자리를 잡게 되어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이요 문화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 명창이 목이 좋거나, 운이 좋아서, 또는 선생을 잘 만나서 명창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의 결과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20세 이전에 방송을 통해서 젊은 명창 묵계월의 이름은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 노래뿐이 아니라 송서로 유명한 이문원의 삼설기(三說記)를 착실하게 배워 오늘에 이어준 고마운 존재라는 이야기, 송서는 다른 노래를 배우지 않고는 부르기 어려운 소리라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힘차면서도 구성진 묵계월 명창의 소리는 연습을 통해서 얻은 결과라는 이야기, 무엇보다도 묵계월의 소리속을 제대로 맛보려면 성음사에서 제작한 민요삼천리라는 음반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 음반을 추천하는 이유는 죽헌 김기수(金琪洙)선생이 민요 반주를 위해 관현악으로 편곡하였는데 묵계월의 노래와 반주음악, 합창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리민요의 멋과 특징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명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경기창은 묵계월과 김옥심(金玉心)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고, 남도창은 성창순, 성우향, 한농선, 오정숙, 남해성 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우리가 흔히 경기소리의 계보를 이야기 할 때, 추, 조, 박을 화두로 삼는다. 추는 추교신(秋敎信), 조는 조기준(曹基俊), 박은 박춘경(朴春景)이라는 명창이다. 추교신의 소리는 장계춘을 거쳐 최경식에게 전해졌고, 최경식의 소리는 최정식을 비롯하여 이창배, 유개동, 박인섭, 김태봉, 정득만, 김순태 등으로 이어졌다. 이창배의 문하에서 최창남을 비롯한 황용주, 박상옥, 백영춘, 임정란, 이춘희, 김금숙, 김혜란, 김국진, 김영임, 이호연, 최영숙 등 현존 한국의 유명 경기명창들이 대거 배출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목청이 좋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 예능보유자(세칭-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전승과정이 충실하고 원형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점이 관건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연주자에겐 악기가 좋아야 하듯, 특히 경서도 소리는 아름다운 목청이 기본인데, 묵계월의 목청은 시원시원하고 힘차며 맑고 아름다워 하늘이 낸 목이라 하였다. 목청뿐이 아니라 넓은 음폭(音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에 끊임없는 훈련과 반복 연습의 생활화가 묵계월을 명창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주수봉 선생에게 소리를 배우고 있던 묵계월은 어린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이 소리를 배우기 위해 주수봉(朱壽奉)에게 찾아갔고, 2년 후에, 주 명창은 남다른 소질을 보이는 그녀를 최정식(崔貞植)에게 보냈다는 이야기, 최정식은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작사, 작곡한 당대 속요(俗謠)계를 주름잡던 거성이었다는 이야기, 소질이 있고 재주가 있는 제자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폐습이 잔존해 있는 것이 이 바닥의 일반적인 생리이거늘, 자기가 아끼는 제자를 큰 선생에게 보내주는 주수봉이라는 명창의 넓은 마음이나 결단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최정식의 스승은 아호가 학강(鶴崗)인 최경식 명창이었는데 당대 대명창으로 그에게 배우지 않은 사범급 명창이 없을 정도였으며 제자들에게 결코 월사금을 받지 않은 사범으로 유명했다는 이야기, 학강의 제자로는 최정식, 유개동, 박인섭, 김태봉, 김순태, 정득만, 이창배 등이 있지만, 선생 앞에 오랫동안 소리를 배워서 선생의 뒤를 이은 명창이 바로 벽파 이창배 사범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러므로 주수봉을 통해 묵계월이 만나게 된 최정식은 당대 최고의 학강 선생의 제자였고, 학강은 그 윗대의 장계춘, 그리고 그 윗대의 추교신으로 이어진 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