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지난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등록문화재로 보존ㆍ관리하고 있는 독립 유공자 묘역 16위에 대한 관리 현장 점검을 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관리 강화와 정비를 위한 조치를 할 예정이다. 또한, 아직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독립유공자 묘역의 추가 등록을 추진한다. * 등록문화재: 국가지정 문화재 등으로 지정되지 않은 근현대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해 문화재청장이 등록한 문화재(2001.7.1 시행) 문화재청은 최근 독립유공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번 점검을 시행하였으며, 모두 16위의 독립유공자 묘역의 관리 상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현재 문화재로 등록한 독립유공자 묘역은 북한산 국립공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는 6위(이준, 손병희, 이시영, 김창숙, 신익희, 여운형)와 도산공원의 1위(안창호), 망우리 공원의 9위(서울시 3위: 서광조, 서동일, 오재영 / 경기도 6위: 한용운, 오세창, 문일평, 방정환, 오기만, 유상규) 등 모두 16위이다. 점검 결과, 손병희ㆍ이시영ㆍ김창숙ㆍ신익희ㆍ문일평 묘소 등 6개소는 잡초제거와 봉분의 잔디를 다듬는 등 경상관리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으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생존 여성독립운동가인 오희옥(92살) 지사께서는 지난 3월 17일,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의식을 회복한 이래 4달째 서울중앙보훈병원 (강동구 진황도로 61길 53) 재활병동에서 치료 요양 중이다. 기자는 오희옥 지사께서 입원 1달째 되던 4월 중순에 찾아뵙고 어제(14일) 다시 서울중앙보훈병원 재활병동을 찾았다. 낮 2시 무렵 찾은 병상에서 오희옥 지사는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간밤에 어머니는 잠을 못 주무신 듯합니다. 아직 코에 꽂은 호스로 미음을 드시고 계셔서 기력회복을 못하고 계십니다.” 면서 잠시 뒤 어머니가 깨어나면 휠체어에 모시고 환자 대기실로 가겠다고 하여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길 10여분, 흰모자를 쓴 오희옥 지사께서 아드님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셨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오희옥 지사는 병문안하러 간 기자를 알아보고 오른손을 약간 흔들어서 반가움을 표시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왼쪽 손, 발을 쓰지 못하는 상태지만 오른손은 쓸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노환에다가 장시간 입원에 따르는 기력 부족으로 대화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오희옥 지사를 모시고 우리는 유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연미당(延薇堂, 1908.7.15.~1981.1.1.) 선생을 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1908년 7월 북간도 용정해관에서 근무하던 연병환(延秉煥)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연병환은 북간도 청년들이 1919년 3월 3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배후에서 이를 지원하다 체포되어 2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人成學校)를 졸업한 선생은 1927년 7월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결혼했다. 결혼 이후 선생은 남편 엄항섭을 내조하며, 자녀들의 교육 나아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와 같은 삶은 당시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여성들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이었다. 나라를 잃은 여성들은 가장으로서의 삶과 함께 독립투사로서의 삶도 요구 받았다. 1927년 11월 상해에서 결성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참여하기 시작한 선생은 상해여자청년동맹에서도 활동했다. 선생이 여기에 투신한 이유는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 독려와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서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년 3·1만세운동 100돌을 앞두고 일본인에게 3·1만세운동 정신을 알리기 위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유관순 기념관과 생가, 독립기념관,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현장과 서대문형무소 등을 돌아보면서 내년 전시에 대한 구상과 해당 기관의 자료 협조를 구하기 위해 방한했습니다.” 하라다 교코(原田京子, 72) 이사장은 이번 방한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6월 18일(월)부터 어제(21일)까지 3박 4일간 서울을 방문한 도쿄 고려박물관 회원 14명은 무더운 날씨 속에 일제 침략기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 현장을 둘러보는 빠듯한 일정을 마치고 어제 오후 귀국길에 올랐다. 고려박물관 회원들은 민족문제연구소 방문을 시작으로 무더위 속에서도일제침략 시 만행의 현장과 기억 공간을 둘러보며 “조상들이 저지른 침략”에 대해 무한한 참회의 뜻을 전했다. 이들의 통역 겸 안내를 위해 동행한 기자는 가는 곳 마다 메모 노트를 꺼내 꼼꼼하게 적어가면서 “참혹하고 잔인했던 역사의 현장”을 기억하려하는 고려박물관 회원들의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이번에 방한한 일본인들은 고려박물관 내 조선여성사연구소 회원들로, 이들은 특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걸출한 인물이 많습니다. 민족수난기에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입니다. 애국지사 중에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분들도 적지 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조소앙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의 업적으로 대표적인 것만 들면 △ 지난 해 100주년을 맞은「대동단결선언」과,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서의 하나로 꼽히는 1919년의「대한독립선언」기초, 상하이 임시정부수립 당시 ‘대한민국’ 국호제안,「대한민국임시정부 헌장(헌법)」기초, 임시정부의정원의원ㆍ국무위원ㆍ외교위원장, 삼균주의사상가, 대일선전포고문작성, 대한민국건국강령작성 등이 꼽힙니다. 선생님은 독립운동사는 물론 민족사에 불멸의 문헌으로 남은 주요한 각종 ‘선언문’을 작성하고, 풍찬노숙의 독립운동가로서 생애를 바쳐 삼균주의사상을 연구하고, 그 결과 삼균주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뿐만 아니라 좌우 독립운동 진영의 이념적 기틀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때 무장투쟁 단체인
[우리문화신문=양인선 기자 ] “조선은 독립의 때가 곧 온다고 힘을 모으자 동포에게 외치던 몸 왜놈에 잡혀 모진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던 날 산천초목도 울고 하늘도 울었어라“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펴낸 이윤옥 시인은 이렇게 김용창 지사를 노래했다. 어제(6월 11일)경기도 화성 향남면 김용창 지사 선영에서는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회 화성시지회(지회장 안소헌) 주관으로 독립운동가 김용창 지사의 추모제가 열렸다. 전통제례로 치러진 추모제는 초헌관에 김용창 지사의 동생 김용무 선생이, 아헌관에 채인석 화성시장이, 종헌관에는 안소헌 광복회지회장이 맡았다. 열아홉 청년 김용창(金容昶, 1926.8.3.~1945.4.3.) 지사는 경기도 향남면 출신으로 열다섯에 상경하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을 거쳐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야간에는 덕수공립상업학교(德壽公立商業學校)에서 미래를 꿈꾸며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다 1944년 보험관리소 판자벽에 연필로 "반도 2천 6백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 독립의 때가 왔다. 지금 와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고 있다. 아아! 가련하도다."라고 써 붙이는 등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1878~1928] 선생은 평남 강서(江西) 사람으로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후,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0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장경(張景) 등과 함께 미주 한인단체의 효시인 친목회(親睦會)를 결성하고 동포간 연락과 친목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5년 4월 동지(同地)에서 안창호등과 함께 미주 최초의 민족운동기관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06년 4월에는 상항(桑港)한인감리교회를 창립하여 한인 동포들의 구호사업과 교육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1908년 6월 오레곤주 포트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동년 12월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미국내 한국어 출판의 효시인 『대도보』라는 주보를 발행하여 매부 본국과 세계의 정세를 전달하는 한편, 기독교의 복음 전도 및 교포 교양에 공헌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부터 최정익(崔正益)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 있는 한인단체를 통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신건식 선생은 1889년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하여 덕남사숙에서 공부하다 상경하여 무관학교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11년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한 후 항저우에 있는 의약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12년 신채호, 신규식 등이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 활동에 참여하고 1925년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 및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외과주임으로 근무하며 난징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와 학생 등의 숙식 경비를 지원하였다. 1937년부터 난징에서 광복진선선전부에 소속되어 선전활동에 주력하였고, 1939년 제31회 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며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한국광복군의 지휘권을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간섭하자 의정원 동료의원과 합심하여 이를 되찾아 왔다. 1943년 재무부 차장으로 선임되었고, 의정원 분과위원으로 재정, 예산, 결산을 담당하며, 재정분야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오건해 선생은 1926년 경 남편 신건식 선생이 있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이동녕, 박찬익 등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938년에는 '남목청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혁 [1875∼1939] 선생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비분하여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에 산업의 진흥과 아울러 무력투쟁을 계획하여 백두산 아래 화룡현(和龍縣)에 자리잡은 대종교 총본사(大倧敎總本司)와 백두산 동북쪽인 왕청현(汪淸縣)에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무장항일 투쟁을 하던 흥업단(興業團)의 부단장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봄에는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徐一)과 경리담당인 계화(桂和)가 계속 병력증강에 힘써 백초구(百草溝) 기타 각지에서 약 300여명의 장정을 모집하고 또 이성규(李成奎)를 국내로 보내어, 대한제국시대의 육군 장교로 활약하던 김규식(金奎植)·홍충희(洪忠熹)·김찬수(金燦洙)·박형식(朴亨植) 등을 동반하여 올 때 그도 유우석(柳佑錫)과 함께 무송현(撫松縣)으로부터 와서 북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하였다. 또한 1922년 8월 30일에 환인현 남구 마권자(桓仁縣南區馬圈子)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이월봉 지사님! 꽃보라 흩날리는 4월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봄처녀들은 삼삼오오 흐드러진 봄꽃 곁에서 사진을 찍거나 연인들과의 데이트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는 계절입니다만 청춘의 한 시절을 이역 땅에서 여자 광복군으로 보내야했던 지사님의 봄은 어떠셨는지요? 지사님께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여군반장 시절 군복 입은 모습의 흑백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부끄러운 질문을 드린 듯해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중국 땅에서 광복군에 지원 입대하여 뛴 세월을 굳이 계절로 말하라면 눈보라치는 겨울이 아닐는지요. 그것도 아주 혹독한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해당되겠지요. “당시 광복군에 속한 여군들은 여자라고해서 특수한 임무가 주어지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남자와 똑같은 일을 했지요. 토치카를 파면 같이 파고, 벽돌을 나르고, 모든 힘겨운 일을 남자와 똑같이 그대로 해냈지요” 이월봉 지사님께서는 1976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