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요리는 눈으로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볼 때는 일본과자도 그런 것 같다. 흔히 일본전통 과자를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라고 한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엔 과자를 비롯한 서양문물이 봇물처럼 밀려들어 왔는데 이때 들어온 과자를 양과자(洋菓子, 요가시)라고 부르고 일본 전통 과자를 화과자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로 치면 한과(韓菓)에 해당한다. 특히 다도(茶道)가 발달한 일본에서 화과자는 차를 대접하는 자리에 빼놓을 수 없는 과자이다. 화과자는 모양과 색이 다양하여 거의 예술작품에 가까운 과자도 수두룩하다. 대개 기름지지 않고 담백하지만 설탕을 많이 써서 그런지 매우 달다. 설탕이 흔치 않던 시절에는 주로 감이나 화삼분(和三盆, 와삼봉)이라고 해서 사탕수수로 만든 정제되지 않은 흑설탕 덩어리를 사용했는데 특유한 향이 있어 지금도 고급 화과자의 재료로 사용된다. 화과자를 예술작품으로 생각해 여름엔 청량감을 느끼도록 과자를 투명하게 만들고 가을에는 단풍을 연상케 하는 등 화조풍월 모양 과자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화과자 중에서 천년 수도였던 교토에서 만드는 과자를 경과자(京菓子, 쿄가시)라고 부르며 2~3백년 된 과자점도
일본에는 어린아이들의 돌이 없는 대신에 시치고상(七五三)이라는 풍습이 있다. 시치고상이란 11월 15일에 여자아이는 7살과 3살, 남자아이는 5살 되는 아이들을 축하 해주는 행사이다. 이러한 행사는 어린아이의 무사성장을 축하하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빌어주는 풍습으로 기모노 차림의 아이들을 부모님이 데리고 신사에 참배한다. 신사에서 ‘시치고상’ 의식을 치른 아이들은 손에 ‘치토세아메(千歲飴)’를 하나씩 들고 있는데 이는 가늘고 길게 만든 사탕으로 장수를 비는 뜻이 있으며 학과 거북이, 소나무, 대나무, 매화 등이 그려진 봉투에 담아준다. 요즈음은 일본도 맞벌이 부부가 많아 꼭 11월 15일에 얽매이지 않고 토, 일요일이 낀 주말에 신사 참배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따라서 이 무렵 일본을 여행하게 되면 길거리 어딘가에서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신사참배를 하러 신사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이 날은 잘 차린 일본 전통옷을 입은 아이들과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가 손을 잡고 신사참배를 하러 나서는 정겨운 모습을 신사 경내나 시내
가을의 오오츠는 곳곳의 단풍으로 길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고구려 스님 혜자의 제자인 성덕태자가 지은 천년고찰 백제사(百濟寺, 滋賀 東近江市)는 일본의 이름난 단풍명소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뿐만 아니라 오오츠 시내에 자리한 삼정사(三井寺)와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도 이제 슬슬 단풍으로 곱게 물들을 것이다. 오오츠의 유명한절 삼정사를 부흥시킨 사람은 지증대사 원진(円珍, 814-891)으로 그의 어머니는 신라계 홍법대사 공해(空海,774-835)의 조카딸이다. 오늘 이야기는 삼정사 이야기가 아니라 삼정사가 있는 오오츠에 살다간 고대 한국인들에 대한 유적지인 온돌터 이야기이다. 알다시피 일본의 방은 다다미라고 해서 우리네 돗자리 같이 풀로 엮은 방바닥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은 지역마다 다르긴 해도 일반적인 형태는 침대이다. 한·중·일 세 나라 가운데 한국의 난방형태는 온돌로 바닥을 돌로 데워 장시간 그 온도를 유지하는 형태이며 방안 전체가 따뜻해 세 나라의 난방법을 다 경험한 필자로서는 한국의 난방법이 탁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과거 일본과 중국의 난방을 말하자면
필자는 독립운동가 특히 여성독립운동가의 역사가 있는 곳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달려가 이분들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번 옛 정명여학교 출신의 7명의 잔다르크 이야기를 필자는 내년 2월 펴낼 예정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3권에 실을 것이며 이 책으로 60명에 이르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게 된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기자 말 터졌고나 죠션독입셩 십년을 참고참아 이셰 터젓네 삼쳘리의 금수강산 이쳔만 민족 살아고나 살아고나 이 한소리에 피도죠션 뼈도 죠션 이피 이뼈는 살아죠션 죽어죠션 죠션것이라 한사람이 불어도 죠션노래 한곳에셔 나와도 죠션노래 ▲ 독립운동가와 격문 1983년 교실 수리 중 천장에서 발견된 독립가(왼쪽) 격문(원본, 독립기념관 소장) ⓒ 정명여중 위 노래는 목포정명여학교(현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독립가이다. "이 자료는 1983년 2월 중학교 교실 보수작업 중에 발견된 것입니다. 바로 이 건물 천장에서 발견된 것인데 보관상 어려움이 따라 현재 천안독립기념관에 가 있으며 우리 자료관에는 복사본이 있습니다. 어서 가서 보시죠." 정명여자중
책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훌륭한 아이를 키운다 창원외동초등학교 어머니독서동아리 '우리말바라기' 12.10.24 16:00l최종 업데이트 12.10.24 18:23l 이윤옥(koya26) RT: 0l독자원고료: 0 이 시대에도 '맹모삼천지교'는 여전히 존재한다. 아니 맹자 시절보다 지나칠 정도로 극성이다. 하지만, 그런 극성스러운 맹모삼천지교가 진정 자식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인가? 오히려 이웃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심만 차리는 부작용이 더욱 심해질 뿐이다. 그런 세태에 진정한 맹모들이 창원에 있다고 해서 다녀왔다. 경남 창원 외동초등학교(교장 맹종호)의 어머니독서동아리 '우리말바라기' 회원들을 만나보고 나니 이들이 진정한 이 시대의 맹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4일 국화꽃이 반기는 교정을 지나 2층 어머니교실로 오르는 현관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교실에는 외동초등학교 어머니들의 독서 동아리인 '우리말 바라기' 회원들이 필자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필자가 이른 아침 서울에서 내려 간 터라 속이 출출할 것을 생각하여 다과를 준비해놓고 있었다.차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어머니들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온다. 필자가 외동초등학교 어머니들을 만나러 간 것
0 해동성국이라 일컫던 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229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을 호령하던 나라로 뛰어난 문화 국가였다. 발해는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고 일본과는 200여 년간 교류를 하였으며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으나 끝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멸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유적은 지금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불가마를 연상하는 뜨거운 7월 중순, 교토의 자그마한 역 단바구치역(丹波口)에서 어렵사리 찾았던 발해유적지 홍로관터를 돌아 보고 와서 발해사를 뒤져보느라 이제야 글을 쓴다. 발해 사신들이 묵었던 교토의 홍로관(코로칸)을 찾아 나선 것은 지난 7월 중순이었다. 교토시내 단바구치역 근처에 있던 홍로관은 지금은 홍로관터였음을 알리는 작은 돌비석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홍로관터 옆에는 제법 근사한 일본의 전통건물이 서있었는데 먼발치에서 이 건물이 홍로관인 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가보니 이곳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요정(角室, 스미야)으로 에도시대인 1641년에 세워져 현재는 교토시의 중요문화재이다. 그 건물
-시대마츠리의 주인공인 간무왕 어머니는 백제여인 고야신립- 천년고도 교토는 화려하다. 헤이안시대의 화려함이 재현되는 듯 수도 도쿄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그 화려함은 세련된 고층빌딩이 많아서도 아니고 유명 브랜드의 패션가가 즐비해서도 아니다. 세련되지 않으면서도 깊이가 있고 말끔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것이 교토의 매력이다. 거기다가 역사와 전통이 깊은 절이나 신사가 즐비하고 또한 마츠리까지 볼 수 있으니 교토로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경(京, 교토)”에 대한 자존심을 가질만한 도시 교토에서 10월 22일에는 지다이마츠리(時代祭)가 열린다. 교토의 3대 마츠리로는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화려한 고대 의상을 입은 출연자들이 교토 시내를 두어 시간 행진하는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 교토다. 마츠리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에 견줄 수가 없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다만,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가장 그 역사가 짧은 것은
이 시는 고향 남원 땅에서 코를 베인 채 먼 이국땅에 가서 귀향하고 있지 못하는 원혼을 달래고자 내가 쓴 시 “코무덤”이다. 일본 교토(京都市 東山) 풍국신사(豊國神社) 앞에는 정유재란 당시에 풍신수길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코무덤이 있다. 이 코무덤은 궁극적으로 고향 남원으로 돌려주어야만 한다. 현재 남원지방에서는 교토 코무덤의 귀환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이 있다. 독자 여러분들도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그날 까지 깊은 관심과 힘을 모아주었으면 한다. 위 시를 본 남원의 한학자 소병호 님께서 ‘코무덤’ 한글 시를 한시로 바꿔 손수 글을 써서 보내왔다. 그 전문을 실어본다.
일본 친구로부터 부등교(후토코우, 不登校)에 관한 책을 선물 받은 지도 벌써 10년하고도 4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도쿄에 있었고 친구는 출판사 편집 일을 하고 있어서 새 책이 나오는 대로 나에게 선물했었다. 뿐만 아니라 왕따(이지메) 따위에 관한 책도 한보따리 선물했는데 나는 오오츠카의 눅진 자취방에서 이런 책들을 읽으며 일본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다. 일본말 이지메(いじめ)는 우리말로 ‘왕따’에 해당되며 그 역사는 오래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폭력’을 일본에서는 ‘교내폭력(校內暴力)이라 부르는데 일본 TBS방송에서 이를 주제로 한 드라마를 1979년부터 제작할 만큼(3年B組金八先生) 왕따와 학교폭력은 오랫동안 일본사회의 큰 관심거리였으며 현재도 진행형이다. 또한 부등교(不登校)라는 말도 흔한 말로 학교가기를 거부하는 아동들이 늘어가고 있는가하면 히키코모리(은둔형외톨이) 문제도 심각하다. 이러한 일들이 이웃나라 일이려니 여기고 있었더니 ‘부등교(不登校)’를 빼놓고는 한국사회도 이제 청소년들의 왕따,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또한 은둔형외톨이나 사회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휘두르는 ‘묻지마살인’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삶을 마감하는 일은 슬픈 일일까? 자유를 만끽 하는 것일까? 일본의 신문지상에서 심심찮게 보도되는 이른바 “독거사(獨居死)”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일본사회에 대두 되고 있다. 일본말로는 “在宅ひとり死, 자이타쿠히도리시”라고 하는데 적당한 우리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독거사(獨居死)’로 해보았지만 “재택1인죽음”, “자기집에서 죽기” 등으로 바꾸어도 마땅치는 않다. 2012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자택에서 삶을 마감하는 사람은 10명중 1명에도 못 미치며 나머지는 모두 병원이나 양로원 등의 시설에서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개호보험(介護保險)”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지만 실질적으로 노부모를 보살필 여력이 없는 가족이 많은 것도 한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월말 도쿄시내에서 열린 사회학자 우에노(上野千鶴子) 씨의 ‘독거사’ 세미나에는 무려 450명의 고령자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몰렸다는 소식이다. 이날 세미나에서 우에노 씨는 ‘독거사’를 맞이하려면 첫째 본인의 강한 의지 둘째 경제력 셋째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천만 엔이나 하는 유료 양로원에 그간 모은 재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