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운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기반이 약하고 언어 등 제약이 있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7년까지 56명의 외국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이에 <4회>에 걸쳐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싣는다. 피치 일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193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필드를 대신하여 아들인 애쉬모어와 그의 부인 제랄딘이 주역이었다. 1909년 장로교 목사가 되어 중국 상하이로 돌아온 애쉬모어는 아버지 필드가 한국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을 계기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애쉬모어는 1923년 2월 아버지 필드가 별세한 이후에는 대체로 중국내 YMCA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애쉬모어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피신을 돕는 등 한국인들을 지원하면서 태평양전쟁기에는 미군을 도와 일본에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의 부인 제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기획전시’를 2018년 연중 실시한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및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감방 12개에 올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인물의 자료를 전시하였다. 자료는 12옥사 오른쪽 6개 감방과 왼쪽 6개 감방에 설치되었으며, 독립운동가의 생애, 독립운동 공적내용 및 사진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기획전시는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등 총 13명의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알리고자 기획되었다. 국가보훈처는 1992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선생을 선정한 이후 총 327명의 독립운동가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며, 그 중에는 여성 22명과 외국인 5명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보훈처는 1997년부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공작사에서 매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교체 전시해 왔으나, 올해부터는 장소를 12옥사로 옮기고 1월부터 12월까지 선정된 인물을 동시에 전시하는 것으로 전시 내용을 변경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리는 기획전시는 올해 연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운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기반이 약하고 언어 등 제약이 있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7년까지 56명의 외국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이에 <4회>에 걸쳐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싣는다. 1870년 11월 5일 중국에 도착한 필드는 상하이와 쑤저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88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 중국지회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인쇄했던 미화서관(美華書館, The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의 책임자가 되었다. 더불어 미화서관에서 매달 간행하는 종교지 차이니즈 레코더(The Chinese Recorder) 의 편집장을 맡았다. 차이니즈 레코더 는 자유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종교지로서 중국에 퍼져가는 민족주의 사조를 반영한 잡지로 명성을 떨쳤다. 필드의 중국 활동은 장로교 선교사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운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기반이 약하고 언어 등 제약이 있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7년까지 56명의 외국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이에 <4회>에 걸쳐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싣는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대한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던 외국인 중 한 명이다.그의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한자명 費啓鴻)와 그의 부인 제랄딘(Geraldine Townsend Fitch)까지 2대에 걸쳐 부자와 부부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피치 목사’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으나 그 일가가 함께 활동했다는 내용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일가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이놈들아! 나도 죽여라!” 이는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현장에서 순국한 최정철(崔貞徹 , 1853.6.26. ~ 1919.4.1.) 애국지사 무덤 묘비석에 적혀 있는 글이다. 무덤을 찾아 간 지난 11월 28일(목)은 몹시 추운 날씨로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길찾개(네비게이션)로 찍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산 8-6 지점은 생각 보다 넓어 무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찾은 최정철 지사의 무덤 앞에 서니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무덤 앞자락에는 아드님 김구응 의사(義士, 1887.7.27.~1919.4.1.)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고, 바로 위쪽에 최정철 지사가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이 일제의 총칼에 찔려 같은 날 비명에 순국하여 제삿날이 같은 이런 비극의 역사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의사(義士) 김구응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일경)이 조선인의 기수(旗手, 행사 때 대열의 앞에 서서 기를 드는 일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석문아! 보아라. 사랑하는 나의 손주 석문아! 나는 아름다운 매화꽃이 만발한 꽃길에서 백범과 함께 걷고 있다. 석주도 만나고, 백야도 만났지. 그러나 역시 즐거운 사람은 3. 1 혁명을 함께 한 석기 형. 광수, 병수 조카 등 여러 동지와 옛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욱 좋구나. 석문아! 나는 하늘나라에서 너를 생각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국교(國敎)와 국사(國史)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國魂)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제4차 산업혁명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완성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천국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난리법석이다. 석문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야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건국일’이라 하지 아니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식’으로 거행하였다. 석문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조애실 장로님은 제가 잘 압니다. 후손은 없으시지만 송암교회에 다니셨으니 교회에 오시면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수유리 송암교회의 이규남 장로와 통화를 마치고 조애실 지사(1920.11.17.~1998.1.10.)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10일(일요일) 송암교회를 찾아간 날은 아침부터 흰 눈이 펑펑 내렸다. 이규남 장로는 12시가 넘으면 예배가 끝나니 그 시각에 맞춰 오면 좋겠다고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조애실 지사님이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로 찾아가는 것이니만치 예배에 참석하는 게 좋겠다싶어 눈 속을 뚫고 2부 예배가 시작되는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조애실 지사는 1965년부터 1998년 1월 10일 78살로 숨을 거두는 날까지 33년간 수유리 송암교회에 다녔다. 한국기독교장로회소속의 송암교회(현 담임목사,김정곤)는 1962년 한국신학대학 강의실에서 교수와 직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모여 만든 교회로 조애실 지사는 초창기부터 어머니와 함께 송암교회에 다녔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간 조애실 지사에게 있어 교회는 친정과 같은 곳이었을지 모른다. 인생 후반기에 원로 장로로 추대되어 그 누구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고모님(이월봉 지사)은 참으로 깔끔하셨습니다.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언제나 조카들 옷가지들을 말끔하게 빨아주셔서 또래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많이 샀지요. 고모님의 부지런하심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월봉(1915.2.15. ~ 1977.10.28.)지사의 조카딸인 이춘화 씨는 그렇게 고모님 이월봉 지사를 회고했다. 이월봉 지사의 후손을 만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간 시각이 점심 무렵이라 우리는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이 자리에는 이월봉 지사의 아드님 이충국(58살) 씨와 조카따님 이춘화 씨, 그리고 서울에서 기자와 함께 동행한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 문영숙 작가(이월봉 지사의 조카 며느님)이렇게 넷이었다. 얼큰한 아구찜을 시켜 놓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우리는 이월봉 지사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뭐니 뭐니 해도 1938년에 열린 중화민국대운동회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운동회는 장개석이 장학량 군대에 감금된 뒤에 풀려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대회로 이 대회에서 어머니는 여자의 몸으로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지요. 이 대회는 요즘으로 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치보(金致寶,1859. 9. 17 ~ 1941. 11. 18) 선생은 평남 평양(平壤) 출신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1908년무렵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여 한민회(韓民會)와 관계를 맺고, 청년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09년 미주 국민회(國民會) 블라디보스톡 지회 회원으로서, 같은 해 4월에는 청년돈의회(靑年敦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하였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는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성명회는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방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톡 개척리 한인학교에서 조직하여 대한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종지(宗旨)를 내외에 알리고자 하였다. 김치보는 1910년 12월 28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된 자선공제회(慈善共濟會)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권업회(勸業會) 통신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권업회는 한인들이 러시아에서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고 조직한 최초의 한인 단체로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4년 동안 연해주 흑룡주 지역의 대표적인 재러한인의 권익옹호기관이자 독립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제 어머니라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어머니는 정말 여장부셨습니다. 중국에서 아기를 업은 채 말을 타고 다니며 독립문서를 전달하셨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도 여자의 몸으로 어찌 그러한 일을 하셨을까 싶습니다.” 오항선(吳恒善, 1910.10.3.~ 2006.8.5.) 애국지사의 아드님이신 권혁우(74살) 지회장 (광복회 부산 남부 연합지회)은 기자를 만나자 마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실타래 풀 듯 풀어 놓았다. 기자는 지난 10일(금) 오후, 오항선 지사의 아드님을 뵙고 이야기를 듣고자 부산 남구 못골로(대연동)에 있는 광복회 연합지회 사무실을 찾았다. “어머님(오항선)은 98살(실제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속옷을 빨아 입을 정도로 정정하셨습니다. 몸도 건강하셨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하셨지요. 저희들에게 자주 당신이 독립운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기에 마치 제가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이는 권혁우 지회장 곁에서 부인 이용순(68살) 씨가 시어머님(오항선)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다. 사이좋은 고부간의 지난 시간들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항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