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선배님의 모교 숭실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후배 송영빈입니다. 2017년 올해 숭실대학교가 120주년을 맞이한 것을 알고계신지요? 숭실대학교가 1897년 개교한 이래 선배님과 같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였고 훌륭한 선배님들이 우리나라, 우리민족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주셨기에 올해 우리학교가 120주년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우리학교에 다닐 수 없었겠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시도 아직 독립이 안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올해 숭실대학교가 120주년을 맞이하는 것처럼 2년 뒤에는 선배님께서 피땀 흘려 일구셨던 임시정부가 100주년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 얼마 전까진 저는 선배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120주년을 맞이하는 모교와 관련하여 친구들과 숭실대학교의 역사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선배님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배님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학교에는 매산 김양선 선생님이 평생 동안 수집하신 유물이 전시된 한국 기독교 박물관이 있습니다. 저는 박물관 한편에 전시되어있는 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이는 순국열사 윤형숙(이명 윤안정엽, 윤혈녀, 1900.9.13.~1950.9.28.)의 무덤 묘비석에 새겨진 글귀다. 지난 17일(금) 낮 2시에 찾은 전남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마을 입구에 있는 윤형숙 열사의 무덤은 2차선 도로 옆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는 양지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간 기자에게 이날 윤형숙 열사의 무덤을 안내한 이는 윤 열사의 조카 윤치홍 (77살) 씨 내외였다. 윤치홍 씨는 윤형숙 열사의 작은 아버지 윤자환(尹滋換,1896 ~ 1949, 2003년 대통령표창 서훈)의 손자로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감기 몸살 중이라 부인(72살)이 운전하는 차로 KTX 여천역까지 마중 나와 함께 윤형숙 열사의 유적지를 안내해주었다. “고모님(윤형숙 열사)의 무덤은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채 저기 보이는 고향(창무리) 마을 뒷산에 가매장되어 있었지요. 그러다가 10년 뒤
[우리문화신문=전남 순천 이윤옥기자] “어머니는 16살 때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에 입학한 이듬해 소녀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일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지요.” 어제(16일) 김귀선 애국지사(1913.12.19.~ 2005.1.16.)의 큰아드님이 사는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를 찾았을 때 김윤수(77살) 씨가 한 말이다. 그는 이어서 “어머니는 92살로 돌아가시기 전 2개월 정도 치매를 앓으셨는데, 그때 날마다 독립만세를 부르셨으며, 일본 순사가 잡으러 온다고 하시면서 마루 밑으로 들어가시곤 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울컥 눈물을 흘렸다. 순간 기자도 가슴이 뭉클했다. 얼마나 가슴 속의 응어리가 컸으면 치매 상태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얼마나 일제 순사가 무서웠으면 마루 밑으로 숨는 행동을 했을까? 시대의 아픔을 겪지 않은 기자로서는 그저 가슴이 멍멍할 뿐이다. 큰아드님 김윤수 씨는 김귀선 지사의 판결문과 공판에 회부된 소녀회 조직원 11명의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기사(1930.9.30.), 전남여자고등학교의 명예졸업장(1972.5.25.), 건국포장증서(1993.4.13.)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국운이 다하였으며 성인의 도가 끊어져 살아갈 마음이 없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것은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또 싫어서 죽을 수 밖에 없다.” 이는 국치일을 당하자 순국 자결한 이근주 지사가 자결에 앞서 한 말이다.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근주(1860~1910)지사는 나라를 잃은 통분을 순국 자결로 일제에 항의했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이근주 지사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자결로 항거했다. 이근주 지사는 김복한, 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의병에 참가하였는데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울분에 쌓인 선생은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을 얻고 말았다. 이근주 지사는 여러 항일 사적을 편찬하였는데 홍주의병 과정을 기록한 『을미록』, 나라가 매군매국(賣君賣國)의 무리에 의해 더럽혀짐을 한탄한 『절의가』, 민영환 선생의 순국을 기린 <혈죽시> 등 여러 항일 기록들을 남겼다. 이근주 지사는 50살이 되던 해인 1910년 9월, 큰형의 환갑이 지난 뒤 부모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9일) 항일여성독립운동가 김반수 지사가 다니던 부산 좌천동에 있는 옛 부산진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전신)를 찾았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이 학교는 경사진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밑에서 걸어 올라가기가 힘에 부칠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26년의 역사를 지닌 부산진교회와 마주보고 있는 아담한 건물의 옛 부산진일신여학교(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 마당에 서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경사진 언덕 밑에서 바라다볼 때 우뚝 솟아 보이는 2층짜리 건물은 막상 올라가보니 외로운 섬처럼 달랑 건물 하나만 남아 있었다. 예전에 학생들이 뛰어 놀았을 운동장도 있었을 법한데 모두 주택과 교회 부지로 바뀌어 버렸고 지금은 쓸쓸한 건물 한 채 앞에 ‘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라는 팻말 하나만이 세워져 있다. 마당에 느티나무 고목 한그루는 당시 소녀들의 함성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낙엽을 떨군 채 서있었다. 마당이 하도 적어 옛 일신학교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기념관을 찾은 시각이 낮 12시였는데 아뿔사, 점심시간이라 1시까지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근처에서 무료한 시간을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보성 안규홍ㆍ박제현 가옥」, 항일독립 문화유산 1건과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곡성 성륜사 안심당ㆍ육화당」, 「원주 모리스 선교사 사택」, 「원주 육민관고등학교 창육관」, 「원주 제1야전군사령부 구 청사」, 「태안 동문리 근대한옥」,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제대 및 세례대」 등 조두 7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였다. 이번에 등록 예고된 「보성 안규홍ㆍ박제현 가옥」은 일제에 항거하여 나라에 헌신한 공로로 머슴과 주인이 함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유일한 곳으로, 한말 호남의병의 대표적 머슴 의병장이었던 안규홍(安圭洪, 1879~1910)과 안규홍 의병부대의 군량관이었던 박제현(朴濟鉉, 1871∼1909)이 살았던 보성군 법화마을에 있는 주거지이다. 안규홍 의병장이 약 20여 년간 담살이(머슴)를 했던 사랑채와 안규홍 의병부대에 군자금과 군수품을 지원했던 박제현의 안채가 원형대로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한말 의병장들의 생가나 주거지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선양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의 가치가 높은 곳이다. * 독립운동가 생가: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등록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존경하는 윤봉길 의사님께.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윤봉길 의사님.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신지요? 윤의사님께서도 그간 하늘에서 봐오셔서 아시다시피 저는 의사님을 매우 존경하는 대한 청년 정양원입니다. 지금 제 나이가 의사님께서 의거를 단행하고 순국하신 때의 나이인 24살 이기도 하고, 다가오는 2019년이 곧 대한민국 100년이 되는 해인만큼 존경하는 윤의사님께 이렇게 100년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국민들은 의사님의 숭고한 희생에 덕을 보아 지금과 같은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고 북녘 동포들은 번영을 누리지 못하고 있어 크게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의사님을 생각할 때면 항상 제 마음에서 의사님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사님의 살신성인이 아니었다면 중국의 백만 대군과 장제스가 감동하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장제스가 당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채상덕(蔡相悳,1862~1925) 선생은 황해도 출신으로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일제 침략으로 조선이 강점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2월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광한단(光韓團)·보합단(輔合團)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회의를 거듭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채상덕 선생은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선생과 함께 통군부에서 활동한 인물들로는 비서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교육부장 김동삼, 실업부장 변창근, 사령관 김창환, 경무감 전덕원 등을 들 수 있다. 대한통군부가 성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된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선생은 부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총장은 김동삼 선생이었다. 1923년 2월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자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상옥 의사님은 해방 후 어떤 민족의 모습을 꿈꾸셨나요? 저는 1919년도 혁신공보 34호 6월29일자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취임연설을 읽으며, 평할아버님이 생 실천 해 나가신 독립운동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 우리가 우리 주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위에 모범적인 공화국을 세워 이천만으로 하여금, 천연의 복락을 누리려 함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희생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여야 하겠오.) 새벽이면 낙산에 올라 소나무에 태극기를 다시던 마음과 동대문 교회의 믿음 생활 속 함께하신 말씀은 이사야서 50장 10절 이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종의 말에 순종하느냐? 빛이 없이 어둠 속을 걷는 자는 주님의 이름을 신뢰하고 자기 하느님께 의지하여라." 그렇습니다. 저는 할아버님의 마음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헤아려 보려고 노력 해 왔습니다. 저는 김상옥 의사님의 형님의 딸 김간난의 첫째 외손주 박진호입니다.할아버님의 마음, 독립운동가의 심정을 시 한편으로 써 봤는데 이 시의 마음이 잘 전달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시한편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둠을 만날 때 박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무정부주의자로 사상을 전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하여 실현하려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방법이 현대사상의 견지에서 보면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상통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게 보는 것이다. …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알맞은 제도와 조직과 구조를 생각해야 했고 그 결과 얻어진 것이 이것이니, 나의 이 사상은 일관된 것이며, 나의 독립운동의 방향이라고 나는 믿는다. … 나는 사심 없이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와 같은 주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무정부주의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