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조애실 장로님은 제가 잘 압니다. 후손은 없으시지만 송암교회에 다니셨으니 교회에 오시면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수유리 송암교회의 이규남 장로와 통화를 마치고 조애실 지사(1920.11.17.~1998.1.10.)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10일(일요일) 송암교회를 찾아간 날은 아침부터 흰 눈이 펑펑 내렸다. 이규남 장로는 12시가 넘으면 예배가 끝나니 그 시각에 맞춰 오면 좋겠다고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조애실 지사님이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로 찾아가는 것이니만치 예배에 참석하는 게 좋겠다싶어 눈 속을 뚫고 2부 예배가 시작되는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조애실 지사는 1965년부터 1998년 1월 10일 78살로 숨을 거두는 날까지 33년간 수유리 송암교회에 다녔다. 한국기독교장로회소속의 송암교회(현 담임목사,김정곤)는 1962년 한국신학대학 강의실에서 교수와 직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모여 만든 교회로 조애실 지사는 초창기부터 어머니와 함께 송암교회에 다녔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간 조애실 지사에게 있어 교회는 친정과 같은 곳이었을지 모른다. 인생 후반기에 원로 장로로 추대되어 그 누구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고모님(이월봉 지사)은 참으로 깔끔하셨습니다.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언제나 조카들 옷가지들을 말끔하게 빨아주셔서 또래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많이 샀지요. 고모님의 부지런하심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월봉(1915.2.15. ~ 1977.10.28.)지사의 조카딸인 이춘화 씨는 그렇게 고모님 이월봉 지사를 회고했다. 이월봉 지사의 후손을 만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간 시각이 점심 무렵이라 우리는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이 자리에는 이월봉 지사의 아드님 이충국(58살) 씨와 조카따님 이춘화 씨, 그리고 서울에서 기자와 함께 동행한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 문영숙 작가(이월봉 지사의 조카 며느님)이렇게 넷이었다. 얼큰한 아구찜을 시켜 놓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우리는 이월봉 지사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뭐니 뭐니 해도 1938년에 열린 중화민국대운동회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운동회는 장개석이 장학량 군대에 감금된 뒤에 풀려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대회로 이 대회에서 어머니는 여자의 몸으로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지요. 이 대회는 요즘으로 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치보(金致寶,1859. 9. 17 ~ 1941. 11. 18) 선생은 평남 평양(平壤) 출신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1908년무렵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여 한민회(韓民會)와 관계를 맺고, 청년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09년 미주 국민회(國民會) 블라디보스톡 지회 회원으로서, 같은 해 4월에는 청년돈의회(靑年敦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하였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는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성명회는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방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톡 개척리 한인학교에서 조직하여 대한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종지(宗旨)를 내외에 알리고자 하였다. 김치보는 1910년 12월 28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된 자선공제회(慈善共濟會)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권업회(勸業會) 통신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권업회는 한인들이 러시아에서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고 조직한 최초의 한인 단체로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4년 동안 연해주 흑룡주 지역의 대표적인 재러한인의 권익옹호기관이자 독립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제 어머니라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어머니는 정말 여장부셨습니다. 중국에서 아기를 업은 채 말을 타고 다니며 독립문서를 전달하셨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도 여자의 몸으로 어찌 그러한 일을 하셨을까 싶습니다.” 오항선(吳恒善, 1910.10.3.~ 2006.8.5.) 애국지사의 아드님이신 권혁우(74살) 지회장 (광복회 부산 남부 연합지회)은 기자를 만나자 마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실타래 풀 듯 풀어 놓았다. 기자는 지난 10일(금) 오후, 오항선 지사의 아드님을 뵙고 이야기를 듣고자 부산 남구 못골로(대연동)에 있는 광복회 연합지회 사무실을 찾았다. “어머님(오항선)은 98살(실제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속옷을 빨아 입을 정도로 정정하셨습니다. 몸도 건강하셨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하셨지요. 저희들에게 자주 당신이 독립운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기에 마치 제가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이는 권혁우 지회장 곁에서 부인 이용순(68살) 씨가 시어머님(오항선)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다. 사이좋은 고부간의 지난 시간들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항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선배님의 모교 숭실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후배 송영빈입니다. 2017년 올해 숭실대학교가 120주년을 맞이한 것을 알고계신지요? 숭실대학교가 1897년 개교한 이래 선배님과 같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였고 훌륭한 선배님들이 우리나라, 우리민족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주셨기에 올해 우리학교가 120주년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우리학교에 다닐 수 없었겠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시도 아직 독립이 안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올해 숭실대학교가 120주년을 맞이하는 것처럼 2년 뒤에는 선배님께서 피땀 흘려 일구셨던 임시정부가 100주년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 얼마 전까진 저는 선배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120주년을 맞이하는 모교와 관련하여 친구들과 숭실대학교의 역사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선배님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배님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학교에는 매산 김양선 선생님이 평생 동안 수집하신 유물이 전시된 한국 기독교 박물관이 있습니다. 저는 박물관 한편에 전시되어있는 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이는 순국열사 윤형숙(이명 윤안정엽, 윤혈녀, 1900.9.13.~1950.9.28.)의 무덤 묘비석에 새겨진 글귀다. 지난 17일(금) 낮 2시에 찾은 전남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마을 입구에 있는 윤형숙 열사의 무덤은 2차선 도로 옆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는 양지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간 기자에게 이날 윤형숙 열사의 무덤을 안내한 이는 윤 열사의 조카 윤치홍 (77살) 씨 내외였다. 윤치홍 씨는 윤형숙 열사의 작은 아버지 윤자환(尹滋換,1896 ~ 1949, 2003년 대통령표창 서훈)의 손자로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감기 몸살 중이라 부인(72살)이 운전하는 차로 KTX 여천역까지 마중 나와 함께 윤형숙 열사의 유적지를 안내해주었다. “고모님(윤형숙 열사)의 무덤은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채 저기 보이는 고향(창무리) 마을 뒷산에 가매장되어 있었지요. 그러다가 10년 뒤
								[우리문화신문=전남 순천 이윤옥기자] “어머니는 16살 때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에 입학한 이듬해 소녀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일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지요.” 어제(16일) 김귀선 애국지사(1913.12.19.~ 2005.1.16.)의 큰아드님이 사는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를 찾았을 때 김윤수(77살) 씨가 한 말이다. 그는 이어서 “어머니는 92살로 돌아가시기 전 2개월 정도 치매를 앓으셨는데, 그때 날마다 독립만세를 부르셨으며, 일본 순사가 잡으러 온다고 하시면서 마루 밑으로 들어가시곤 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울컥 눈물을 흘렸다. 순간 기자도 가슴이 뭉클했다. 얼마나 가슴 속의 응어리가 컸으면 치매 상태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얼마나 일제 순사가 무서웠으면 마루 밑으로 숨는 행동을 했을까? 시대의 아픔을 겪지 않은 기자로서는 그저 가슴이 멍멍할 뿐이다. 큰아드님 김윤수 씨는 김귀선 지사의 판결문과 공판에 회부된 소녀회 조직원 11명의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기사(1930.9.30.), 전남여자고등학교의 명예졸업장(1972.5.25.), 건국포장증서(1993.4.13.)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국운이 다하였으며 성인의 도가 끊어져 살아갈 마음이 없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것은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또 싫어서 죽을 수 밖에 없다.” 이는 국치일을 당하자 순국 자결한 이근주 지사가 자결에 앞서 한 말이다.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근주(1860~1910)지사는 나라를 잃은 통분을 순국 자결로 일제에 항의했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이근주 지사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자결로 항거했다. 이근주 지사는 김복한, 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의병에 참가하였는데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울분에 쌓인 선생은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을 얻고 말았다. 이근주 지사는 여러 항일 사적을 편찬하였는데 홍주의병 과정을 기록한 『을미록』, 나라가 매군매국(賣君賣國)의 무리에 의해 더럽혀짐을 한탄한 『절의가』, 민영환 선생의 순국을 기린 <혈죽시> 등 여러 항일 기록들을 남겼다. 이근주 지사는 50살이 되던 해인 1910년 9월, 큰형의 환갑이 지난 뒤 부모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9일) 항일여성독립운동가 김반수 지사가 다니던 부산 좌천동에 있는 옛 부산진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전신)를 찾았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이 학교는 경사진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밑에서 걸어 올라가기가 힘에 부칠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26년의 역사를 지닌 부산진교회와 마주보고 있는 아담한 건물의 옛 부산진일신여학교(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 마당에 서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경사진 언덕 밑에서 바라다볼 때 우뚝 솟아 보이는 2층짜리 건물은 막상 올라가보니 외로운 섬처럼 달랑 건물 하나만 남아 있었다. 예전에 학생들이 뛰어 놀았을 운동장도 있었을 법한데 모두 주택과 교회 부지로 바뀌어 버렸고 지금은 쓸쓸한 건물 한 채 앞에 ‘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라는 팻말 하나만이 세워져 있다. 마당에 느티나무 고목 한그루는 당시 소녀들의 함성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낙엽을 떨군 채 서있었다. 마당이 하도 적어 옛 일신학교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기념관을 찾은 시각이 낮 12시였는데 아뿔사, 점심시간이라 1시까지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근처에서 무료한 시간을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보성 안규홍ㆍ박제현 가옥」, 항일독립 문화유산 1건과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곡성 성륜사 안심당ㆍ육화당」, 「원주 모리스 선교사 사택」, 「원주 육민관고등학교 창육관」, 「원주 제1야전군사령부 구 청사」, 「태안 동문리 근대한옥」,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제대 및 세례대」 등 조두 7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였다. 이번에 등록 예고된 「보성 안규홍ㆍ박제현 가옥」은 일제에 항거하여 나라에 헌신한 공로로 머슴과 주인이 함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유일한 곳으로, 한말 호남의병의 대표적 머슴 의병장이었던 안규홍(安圭洪, 1879~1910)과 안규홍 의병부대의 군량관이었던 박제현(朴濟鉉, 1871∼1909)이 살았던 보성군 법화마을에 있는 주거지이다. 안규홍 의병장이 약 20여 년간 담살이(머슴)를 했던 사랑채와 안규홍 의병부대에 군자금과 군수품을 지원했던 박제현의 안채가 원형대로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한말 의병장들의 생가나 주거지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선양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의 가치가 높은 곳이다. * 독립운동가 생가: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등록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