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멕시코 라파스 양인선 기자] 멕시코 '라파스'여행 마지막날 아침! 오늘은 아름다운 해변가 풍광을 주로 소개하고자 한다. 그림으로만 보았던 펠리칸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게다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발치에서 돌고래가 뛰놀고 또한 돌고래와 먹이다툼을 하는지 펠리칸이 같이 옮겨다니는 모습도 관찰 할 수 있었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세워진 멋진 청동 조각상들도 감상해 볼만하다. 물개와 거북이형상을 한 쓰레기통 까지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구름 한점없이 늘상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물살을 가르는 형형색색의 요트도 볼만하다. 그리고 석양을 바라보며 낭만에 젖어보는 것도 멋진 일이다. 근처의 얕은 바다에서는 초보자도 카약 또는 페들보트등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 멕시코 라파스를 떠나며 생후 한달 된 손자에게줄 알록달록 물고기모양 모빌을 장터에서 사가지고 와서 숙소 천장에 매달아 놓고 무심히 바라다보고 있다. 장터를 들리기 전푸르고 드넓은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 한 장을 찍으며 추억에 오래 남을 멕시코여행을 마무리했다. Hola! Gracias! Adios Mexico! 안녕! 고마워! 굿바이 멕시코
[우리문화신문= 멕시코 라파스 양인선 기자] 일주일을 먼 이국땅에 머물며 살아보는 귀한 체험을 했다. 넓게보면 지구촌의 같은 인간의 삶이지만 세세히 보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삶이 펼쳐지고 있다. 평소 내 삶의 모토로 삼고있는 ' 문명에는 우열이 있는게 아니라 다름이 있을 뿐이다'를 다시한번 확인한 셈이다. 이번 여행길에 동행한 딸 내외는 미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다.특히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어렵게 미국으로 이주한 중ᆞ남미계 어린이들(new comer)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딸이 잠시라도스페인어를 배워보려고현지인들과 대화를 시도해보고있는 모습이 대견했다. 여행내내 인상 깊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멕시코 여성들의 빵빵한 엉덩이였다. 건강과 아름다움의 상징인듯했다. 아울러 멕시코 남성들이 차려입을 때 착용하는 창이 넓으며 끝이 말려올라간 모자 끝이 뾰족한 가죽 신발과 화려한 벨트 따위를 파는 가게들과흥을 돋을때 연주하는 기타 등도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모습이었다. 해변가에서 몇 골목을 걸어 안쪽으로 들어가면 현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장이 펼쳐진다. 그야말로 전통 멕시코인들의 풋풋한 삶이 묻어나는 곳이라 더욱 정감이 갔다. 뭐니뭐니해도 현지의 음
[우리문화신문= 멕시코 라파스 양인선 기자] 멕시코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교사로 살고 있는 딸 내외와 함께 봄방학을 맞아 멕시코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다. 오늘이 나흘째인데 한국사람은 고사하고 아시아계도 만난 적이 없다. 글 한줄 사진 한장 남겨 소개하지 않으면 후회할 듯하여 펜을 들었다. '라파스'는 남부 캘리포니아 라는 뜻의 '바하캘리포니아수르'주의 코르테즈만 연안에 있는 아름다운 해양도시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크루즈가 간혹 들르기도 하지만, 영어나 미국 달러가 사용되지 않는 진짜 멕시코 도시가 ‘라파스’다. 나흘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하여 캘리포니아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멕시코 공항 '로스카보스(Los Cabos)'에 내렸다. 리조트가 즐비한 근처 Cabo San Lucas 에서 봄 휴가를 즐겁게 보내러 온 대학생들과 아이를 대동한 부모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두 시간 이상 북쪽으로 자동차로 달려 '라파스'로 향했다. 자동차로 달리는 내내 간간이 선인장 정도가 자라고 있을 뿐 척박한 황무지가 대부분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디푸른 하늘과 청량한 공기가 상쾌했다. 미국과 마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제가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떠난 것이 33살 때로 제 나이 올해 65살이니 벌서 31년째 입니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어요. 밥말리(Bob Marley, 1945~1981)라는 자메이카 가수의 1979년 일본 공연을 보고 아프리카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요. 처음에는 밥말리의 고향인 자메이카에 가려고생각했으나 결국은 짐바브웨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를 사랑하여 올해 31년째 그곳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있는 다카하시 도모코 (高橋朋子, 재너글아트센터 대표) 씨는 기자와의 대담 첫머리에 아프리카로 떠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다카하시 씨는 짐바브웨 어린이 공연단을 이끌고 6월의 일본 공연 준비차 도쿄로 가기 전 잠시 한국에 들러 지난 13일(월) 인천관동갤러리에서 기자와 만났다. “33살의 과년한 딸이 아프리카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를 안했나요?” 기자의 질문에 다카하시 씨는 웃으며,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의 반대는 특별히 없었다고 했다. 그 대신 자메이카 가수 밥말리의 일본 공연 뒤 ‘아프리카로 떠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27살 때부터 무려 6년간을 구두쇠처럼 절약했다고 했다. 한 푼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싱가포르는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작은 도시국가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 버려진 땅이었떤 이곳은 말레이지아 반도의 끝에 위치하여 말레이지아가 자신들의 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별도의 도시국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여러 문화속에 살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통일된 사상이 없이 혼재하여 하나의 나라로 다스리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곳이 싱가포르를 통치한 한 정치가의 노력으로 이제는아시아의 다양한 문화가 혼합하여 공존하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싱가포르는 지역적으로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사이에 있어, 고대의 아시아 문화가 모조리 융합되어혼재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2600년 전에 성립된 불교와 흰두교 유교등 아시아의 문화와 이후 들어온 근세에는기독교와 이슬람교까지 다양한 종교들이 상호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는 이중에 티벳에서 번영하던 티벳불교사원으로 유명한 석가사를 방문해 보았다. 티벳불교는 중국의 불교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대승불교와 라마불교의 혼재된 듯한 모습이었다.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늘 보아오던 한국의 절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전각에 우선국가가
[우리문화신문= 스리랑카 골 이윤옥 기자] 인도양의 저녁놀이 아름다운 스리랑카 최남단 골(Dutch Fort At Galle)은 여느 바다와 같아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식민의 뼈아픈 역사를 경험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러하다.이곳은 지금 관광객들이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며 아름다운 해변을 산책하지만 17세기 식민지시대의 아픔이 남아 있는 곳이다. 콜롬보에서 173km 떨어진 항구 도시 골은 17세기에네덜란드가 해안가를 따라 거대한 장벽을 쌓아 요새를 만든 곳이다. 요새 안쪽에는 당시네덜란드식 집들이 거대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15세기 포르투칼에 이은네덜란드통치에 이은 영국 식민지 까지 근 500년을 식민의 역사에 시달린 스리랑카의 역사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식민의 흔적은 관광자원화 되어 21세기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불교 유적을 찾아 떠난 9일간의 스리랑카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골해변을 걸으며 오늘도 어김없이 뜨고 지는 태양만이 유일한 불변의 ‘그 무엇’ 임을 느낀다. 1948년 영국으로 독립 뒤 또 다시 30년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스리랑카가 전쟁 종식을 맞이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그 아픔의 상처를 걷어내고 또 다시
[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담바라 이윤옥 기자] 담바라(Cave Temples of Dambulla)에는 거대한 동굴사원이 있다. 기원전 1세기 남인도 타밀족의 공격을 받을 당시의 왕은 이 거대한 동굴로 몸을 피했다. 그러다가 왕권을 다시 찾은 왕은 부처님의 가피를 잊지 않고 이곳 담바라 동굴에 장엄한 사원을 지은 것이다. 담바라는 수도 콜롬보에서 148km 떨어진 곳이지만 기자 일행은 부처님이 두 번째 방문한 스리랑카 최북단 자푸나로부터 중간 중간의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담바라로 이동하는 바람에 콜롬보를 떠난 나흘만에야 어제(4일) 담바라에 도착했다. 담바라 역시 30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였지만 나무 그늘에 서면 제법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담바라에는 모두 5개의 크고 작은 동굴사원이 있는 데 가장 큰 동굴은 제2동굴로 길이 50미터, 높이 7미터, 깊이 25미터로 동굴사원에 들어서면 끝이 아득할 정도로 넓다. 이 거대한 동굴사원에는 벽마다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빼곡하고 동굴 속에는 무려 56개의 불상들이 누워있거나(와불), 앉아있거나(좌상), 서있는 모습(입상)으로 가득하여 참배객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든다. 규모로 보면 중국 감숙성의 둔황 석굴이나
[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자푸나 이윤옥 기자] 섭씨30도를 오르내리는 속에 부처님 두 번째 방문지인 나거디바(NAGADEEPA)로 가기 위해 자푸나(JAFFNA)에서 1박을 하고 아침 8시 나거디바로 향했다. 나거디바는 스리랑카 최북단으로 남쪽 콜롬보로부터 승용차로 6시간은 달려야 다다르는 곳이다. 아직 고속도로가 없어 2차선 국도로 달리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런지 나거디바는 관광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곳이지만 부처님이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8년 만에 다시 스리랑카를 찾은 두 번째 성지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9달 만에 인도 부다가야에서 스리랑카 마히양거나(Mahiyangana)로 온 것이 첫 번째 방문이고 이후 8년이 지나 다시 이곳 나거디바로 오셨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왕좌(王座)를 놓고 마호다라(형)와 추호다라(동생)가 싸우고 있었는데 이를 해결해주기 위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 형제는 부처님의 설법에 감명을 받아 왕좌(王座)를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다. 왕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 것을 반성하는 뜻에서 왕의 의자를 부처님께 보시하는 모습이 나거디바 사원 법당에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자푸나에서 이곳 나거디바를
[우리문화신문= 스리랑카 아브하야기리 이윤옥 기자] 사리탑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는 어디를 가나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사리탑을 만날 수 있다. 고도(古都) 아부하야기리(Abhayagiri)를 찾은 것은 어제 2일(목)이었다. 그제 부처님이 첫발을 내디딘 마히양거나(Mahiyangana)를 출발하여 이곳 아부하야기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했다. 계속해서 지방도시를 다니다보니 호텔 시설이 썩 좋지 않은데 견주어 규모가 큰 절들은 호텔보다 나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방도시의 호텔이란 우리나라 80년대 모텔 수준 정도이다. 초기 사원이 집중되어 있는 고도라서 인지 곳곳에 사리탑이 즐비하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사리탑의 규모는 보통 현대건축물의 20층 정도로 탑 아래서 올려다보면 탑 상륜부가 보일듯 말듯할 정도로 그 규모에 압도당하고 만다. 강력한 왕권의 보호아래 있었던 불교는 누가 더 높은 탑을 쌓는지를 경쟁이라도 하듯 탑과 절의 규모를 확장해갔다. 기원전 3세기 일이니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기 약 700년 전 일이다. 스리랑카에 사리탑이 많은 까닭은 부처님 열반 뒤에 인도에서 흰두교가 성행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부처님 열반 뒤에 인도 각지
[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폴론나루와 이윤옥 기자] “스리랑카에 부처님이 첫 발걸음을 하신 것은 인도의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아홉 달 만의 일입니다. 2500여 년 전 당시 인도와 스리랑카는 지금처럼 바닷길을 건너야하는 육지와 섬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이었지요. 현재도 인도와 스리랑카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22킬로밖에 안됩니다. 당시 부처님은 남인도 타밀족(Tamil族)과의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오셨지요. 이후 두 번째 방문은 8년 뒤의 일입니다.” 어제(2월 1일) 아침에 찾은 마히양거나(Mahiyangana) 사원의 주지 남므라타나 스님은 기자에게 이 사원의 유래를 그렇게 말했다. 그제(1월 31일) 밤 캔디의 불치사(佛齒寺)를 들려오느라 밤늦게 마히양거나 사원에 도착한 기자 일행은 밤 8시가 다되어 주지스님을 잠깐 뵙고 다시 이튿날인 어제 정식으로 찾아뵌 것이었다. 남므라타나 스님 말대로라면 이 절은 2531년(올해 불기)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절이다. 부처님이 인도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뒤 1년이 채 안된 9달 뒤에 스리랑카의 이곳 마히양거나를 찾은 기념으로 생긴 이 절의 역사는 곧 부처님의 역사 그 자체이건만 스리랑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