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 나이 18~19살 때 미중(美仲, 박지원) 선생이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자자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백탑 북쪽에 있는 집을 찾아 갔다. 선생은 내가 왔다는 말에 옷도 채 걸치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시며, 오랜 벗처럼 내 손을 잡으셨다. 지은 글을 모두 꺼내더니 읽어보라고 하시고, 손수 쌀을 씻어 밥을 하셨다. 흰 주발에 가득 담아 옥소반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건배하셨다.” 이렇게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살을 일컬음)도 안 된 나이의 박제가와 당시 32살 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첫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연암은 어린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산 것입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은 그들은 서로 짧은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연암은 “(앞줄임)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 또 호리병까지 보내니 가득 채워 보냄이 어떠한가?”라고 박제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돈 좀 꿔달라는 얘기를 이렇게 빙빙 돌려서 얘기한 것입니다. 돈 꿔달라고 하면서 술병까지 보내는 장면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러자 박제가는 “열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되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200닢의 공방(孔方, 엽전)은 편지 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41년 전(1878년) 11월 3일은 의병대장 신돌석 선생이 태어난 날이지요. 신돌석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의 평민출신 항일 의병장으로, 을미사변과 을사늑약 이후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준 활약을 하였습니다. 선생은 19살의 나이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지요. 1906년 3월 13일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선생의 명성을 듣고 많은 청장년들이 몰려와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0여 명으로 커졌고 사기는 충천하였습니다. 선생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먼저 영해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한 뒤, 그 해 4월에는 울진 장흥관에 정박 중이던 일본 배 9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동해안 일대와 경북 내륙지방, 강원도 내륙지방 등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지요. 이에 따라 일본군은 선생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선생은 1907년 11월 이인영, 허위, 이강년 등 양반 유림이 중심이 되어 13도창의군을 결성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7월 23일 문화재청은 2007년 부여 왕흥사 목탑 터에서 발견되어 공개된 이후 2012년 보물 제1767호로 지정되었던 “부여 왕흥사터 출토 사리기(舍利器)”를 발견한 지 12년 만에 국보 제327호로 승격했다고 밝혔습니다. ‘사리기(舍利器)’란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은 그릇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국보가 된 부여 왕흥사터 출토 사리기는 바깥부터 청동제 사리합-은제 사리호-금제 사리병 3겹으로 포개진 채 발견되었는데, 가장 바깥 사리기인 청동제 사리합에는 6줄 29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글의 내용으로 577년(정유년丁酉年) 2월 15일 창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세우고 목탑에 사리기를 넣은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제 사리기로 확인되었지요. 이 사리기는 표면에 새겨진 글씨로 제작연대(정유년丁酉年, 577년)를 명확히 알 수 있음은 물론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기로서 역사성과 희소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아울러 예술적인 면에서도 그 모양과 제작기법의 완성도가 높아 ‘검이불루화이불치(儉異不陋華而不侈)’ 곧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36년 전인 1883년(고종 20)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된 날입니다. 한성순보는 서울 저동(지금의 을지로2가)의 통리아문(統理衙門) 박문국(博文局)에서 월 3회 발행한 순보(열흘 간격으로 발행)였지요. 1882년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수신사(조선 말 고종 때 일본에 보내던 사신)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 머무르면서 국민대중의 계몽을 위한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깨닫고 신문제작을 위해 기자와 인쇄공 등 몇 명의 일본인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1883년 8월 17일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행하도록 허락하게 됩니다. 이때 김인식(金寅植)이 신문 발행 실무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근대적인 신문기자의 전신인 주사(主事)와 사사(司事)를 임명했습니다. 이 신문은 ‘순보서(旬報序)’에서 “우리 조정에서 관청을 만들어 외국신문을 널리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사건도 실어서 나라 안에 배포할 것”이라고 내세우고, “시세를 살펴 흐르지도 말고 빠지지도 말며 좋고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여 도리에 맞게 구해서 바른 것(正)을 잃지 않는다면, 박문국을 개설하고 신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전체 길이 8.5m에 이르는 보물 제2029호 ‘이인문 필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가 있습니다. 강산무진도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 궁중화원으로 이름을 떨친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 그린 긴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끝없이 이어지는 대자연의 풍광을 묘사한 산수화지요. 하지만, 산수 그대로가 아닌 웅장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세상을 묘사한 관념적인 산수를 그린 것으로, 넓은 들판에서 시작하다가 우뚝 솟아오른 절벽이 보이는 앞부분과 험준한 산세가 중첩되어 광활하게 그려진 중간부, 그리고 다시 잔잔한 들판으로 연결되는 구성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준법(皴法) 곧 동양화에서, 산악ㆍ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모든 기법을 쓴데 있습니다. 곧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나타내는 부벽준(斧劈皴), 쌀알 모양의 점을 여러 개 찍어서 그리는 미점준(米點皴)등 다양한 동양화의 준법이 총동원된 그림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준법의 구사를 통한 산세의 묘사, 그리고 아주 작고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꼼꼼한 표현이 어우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주를 마신다 / 슬픔을 타서 소주를 마신다 / 사랑을 되새기며 소주를 마신다 / 배신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신다 / 인생을 풀어 놓고 / 고통을 참아가며 / 저주와 능멸을 버리기 위하여 /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신다 / 가슴을 열고 환희와 행복을 / 찾기 위하여 소주를 마신다.” <소주 / 성기조> 우리가 흔히 소주(燒酒)라고 하는 것은 노주(露酒)ㆍ화주(火酒)ㆍ한주(汗酒)ㆍ백주(白酒)ㆍ기주(氣酒)라고도 하는데 증류주와 희석주로 크게 나눕니다. 이 가운데 증류주는 소줏고리라는 증류기로 증류한 술이며, 특이한 향을 강하게 풍기는데 조금씩 빚는 술로 예로부터 널리 마셔왔습니다. 일반 양조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서 오래 두면 대개 식초가 되거나 부패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점을 없애려고 만든 것이 증류식 소주입니다. 현재 전통주의 맥을 이어오는 안동소주ㆍ개성소주ㆍ진도홍주ㆍ제주민속주 등이 그것이지요. 페르시아에서 발달한 증류법이 원(元) 나라와 만주를 거쳐 고려로 들어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서 발전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희석식은 고구마나 타피오카 등의 원료를 발효시켜 정제한 주정(에틸알코올)에 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궁중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권초의 예(捲草之禮)’라는 것이 있다. 곧 태어난 날 다북쑥으로 꼰 새끼를 문짝 위에 걸고, 자식이 많고 재화가 없는 대신에게 명하여 3일 동안 소격전(昭格殿, 조선시대에 도교 의식을 위하여 설치한 관서)에서 재를 올리고 초제(醮祭, 별에 지내는 제사)를 베풀게 하는데, 상의원(尙衣院)에서는 5색 채단을 각각 한 필씩 바쳤고, 남자면 복건(頭)ㆍ도포ㆍ홀(笏)ㆍ오화(烏靴)ㆍ금대(金帶)요, 여자면 비녀ㆍ배자(背子 ; 덧옷)ㆍ혜구(신의 하나) 등의 물건을 노군(老君, 물러난 임금) 앞에 진열하여 장래의 복을 빌었다.” 위 글은 조선 전기 학자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나오는 것으로 여기에 보면 왕자가 태어났을 때 바치는 예물로 덧옷의 하나인 ‘배자’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배자’는 이미 조선 전기부터 입었던 옷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견주어 ‘마고자’는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들여 온 만주족 옷인 “마괘”를 변형한 것이고 ‘조끼’는 양복이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온 것으로 서양 조끼를 변형하여 입은 것입니다. ‘배자’와 ‘마고자’ 그리고 ‘조끼’는 모두 한복 저고리 위에 입는 덧옷이지만 다른 점은 마고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해일에 관청에서나 여염집에서 소나무 차양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매년 더운 여름에 궁궐도감이 왕의 침전에 소나무로 차양을 만들면 그들에게 은병(銀甁, 화폐) 두 개를 내려주는 전례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 왕이 ‘관청과 여염집의 소나무 차양을 금지하는데 나만 해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띠를 엮어서 차양을 만들도록 바꾸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도감 관리들이 은병 두 개를 잃었구나.’라고 했다. 이는 《고려사》5 충렬왕 3년(1277) 기록에 나오는 얘기로 고려시대 이미 처마 끝에 소나무로 가림막을 하는 소나무 볕가리개(차양, 遮陽) 풍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생솔가지를 꺾어 엮어서 매달아 더위를 막는 것이지요. 조선 중기의 유생 오희문(吳希文)이 쓴 《쇄미록(瑣尾錄)》에도 “소나무 차양을 만들려 해도 긴 나무기 없어서, 소즐이 종과 말 세 필을 끌고 유선각의 호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왔다.”라는 구절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그 풍습이 계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옥의 처마는 비를 가리는 데에 썼을 뿐 아니라 실내조명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처마를 길게 하면 빛이 적게 들어왔고 짧게 하면 비를 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이는 산 모습이 점점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는 기러기가 놀라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하지만 근심이 되는 것은 늙은 농부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맞으며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위는 조선 중기 문신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 나오는 상강 기록으로 오늘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상강”입니다. “상강(霜降)”은 말 그대로 물기가 땅 위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첫 얼음이 얼기도 하지요.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으며,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른데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누렇고 빨갛게 바뀝니다. 옛 사람들의 말에 “한로불산냉(寒露不算冷),상강변료천(霜降變了天)”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한로 때엔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상강 때엔 날씨가 급변한다.”는 뜻이지요.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 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는 고려 때 놓은 것으로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농다리”가 있습니다. 농다리는 대그릇 농(籠) 자를 써서 큰물을 담을 수 있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위에서 보면 커다란 지네 같다고 하여 지네다리, 장마 땐 물이 다리 위를 넘어간다 하여 수월교(水越橋)라고도 합니다. 이 다리와 관련된 전설로는 고려 고종 때 임행(林行) 장군이 눈보라가 치는 겨울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때마침 젊은 부인이 친정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에 차가운 물을 건너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 효심에 감탄, 용마를 타고 하루아침에 이 다리를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다리는 보랏빛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리도록 쌓았으며 돌 사이를 석회로 채우지 않았지만 즈믄 해(천년) 동안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요. 요즘 같은 신건축공법이 아닌 기술임에도 천 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딘 농다리는 건축학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라고 합니다. 이 다리는 28칸의 교각을 물고기 비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