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전수희 기자] 함춘원은 조선시대의 정원으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있는 곳이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창경궁의 동쪽, 경희궁 개양문의 남쪽 등에 있는 궁궐의 정원 이름이 함춘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중 그 입지나 규모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창경궁 동쪽의 것이다. 함춘원은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을 짓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성종 24년(1493)년에 정식으로 이름이 붙여져 창경궁에 딸린 정원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밖의 백성들의 집을 없애고 넓혔으며, 군대를 배치하여 일반인이 못 다니게하고 대문을 만들었다. 그 뒤 중종은 백성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덕빈의 시신을 임시로 묻는 등 점차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복사에 나눠주었다. 이후 140여년간 말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 경모궁터의 함춘문 (전에는 함춘원이라 부름) 영조 40년(1764)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 지었고, 정조가 즉위하자 이곳을 경모궁으로 불렀으며, 정조 9년(1785)에는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광무 3년(1899)에 경모궁에 있던 장조 곧 사도세자의 위패를 종묘로 옮기면
[그린경제 = 최미현 기자]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2 (궁정동) 에는 이른바 칠궁(七宮)이 있는데 육상궁, 연호궁, 덕안궁, 저경궁, 대빈궁, 경우궁,선희궁을 일컫는다. 이 가운데 육상궁(毓祥宮)은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 육상궁을 포함한 칠궁모습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 칠궁의 현판 칠궁은 육상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을 일컫는데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이다. 육상궁은 나즈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고 왼쪽에는 네 개의 사당이 각기 독립해 서로 접하여 서있다. 이 사당 앞쪽에는 제사지내는 곳과 우물이 있으며 그 앞에 정문이 있다. 제사 지내는 건물 주위의 뜰은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사적 제149호 *(육상궁(지상건물일체포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이다. 그러나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건립하고자 궁내의 많은 전각을 헐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일제는 1932년 남산 자락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해방후 박문사는 폐사되고 흥화문은 영빈관(迎賓館)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경희궁흥화문 (慶熙宮 興化門)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移轉)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 자리는 동향을 보고 배치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현재 찾기 힘들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다포 양식 건물로, 정전인 숭정전, 황학정과 더불어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출처: 문화재청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국사당은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 신을 모신 당집으로 요란한 굿판을 벌이기 쉽도록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세운 굿당에 속한다.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전을 강요하자 건물을 해제하여 현재의 인왕산 기슭에 옮겨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인왕산을 택한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에 속하고 현재 무속신으로 모셔지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양끝의 2칸은 이곳으로 이전한 후 새로 지은 것이다. 1칸은 4쪽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내부의 3면에는 무신도가 걸려있고 마루에는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건물보다 구조는 간단한 편이나 그 규모는 더 크다. 1925년 무렵에 새로 지은 국사당은 영정조때의 건축기법을 바탕으로 한 원래의 국사당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내부 대들보가 아치형으로 된 것이 특이한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목재 짜임새가 튼튼한 것이 목공 솜씨가 돋보인다. 인왕산 국사당은 다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 관상감 관천대 조선시대 기상대나 천문대인 관상감이 있던 자리에 설치한 것으로, 흔히 소간의대(小簡儀臺)나 별을 관측하는 대 라는 뜻에서 첨성대(瞻星臺)라고 불렀다. 세종 16년(1434)에 설치된 서운관의 관측대로서, 서운관은 천문, 지리, 측후, 물시계와 관련된 일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서운관은 조선 세조 12년(1466)에 관상감, 고종 31년(1894)에 관상소, 1907년에 측후소로 바뀌어 현대식 시설을 갖추기 시작할 때까지 업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관천대는 다듬은 돌을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만들었고,그 위에 직사각형의 돌로 난간을 둘러 놓았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경주에 있는 신라의 첨성대, 개성 만월대의 고려 첨성대, 서울 창경궁 내의 관천대와 더불어 우리나라 천문 관측역사의 발전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자료 ※(관상감관천대 서울 관상감 관천대)으로 명칭변경 (2011.07.28 고시)
[그린경제 = 이한영 기자]국제도시 서울에 상수도시설이 없었을 때 시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체계적인 물관리로 수도꼭지만 틀면 좔좔 물이 나오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지만 그렇다고 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지금의 서울이 한양으로 불리던 시절 우물은 백성들의 중요한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 우물 겉 모습으로 화강암 두쪽을 댄 모습이다. 조선시대에 종친부(宗親府)가 있던 터에 자리한 이 우물은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상부에 네 귀가 조각되어 있다. 내부는 자연석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는 이 우물의 원래의 형태가 아니고 1984년에 기무사에서 뜰 공사 도중 지하 3m에서 우물돌을 발견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 새로 조성한 것이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을 구조물 1점이 현재 이 우물 내부에 놓여 있다. 네 귀가 조각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우물과 같이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인 특징을 갖는 우물은 창경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원에도 있다. ▲ 우물 안쪽 이 우물은 원위치에서 옮겨져 원형은 잃어 버렸으나 표면 풍화상태로 보건대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상당히 오래된 우물로 판단된다. 또한
[그린경제 = 최미현기자] 고종(재위 18631907)이 황제가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 때의 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미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고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비석은 귀부, 비몸,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몸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건물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 기념비석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그린경제 = 한성훈 기자] ▲ 서울 재동 백송 (사진 문화재청 제공) 재동에 600년 된 나무가 있다. 어마어마한 세월을 살아온 주인공은 백송나무로 높이 17m, 뿌리부분 둘레 3.82m이다. 다른 백송에견주면 큰 것인데, 줄기가 아랫부분에서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줄기를 지탱하기 위한 받침대가 세워져 있으며 나무의 모습은 좋은 편이다. 재동 백송 주변터는 예전에는 창덕여자고등학교 교정이었으나, 현재는 헌법재판소가 위치하고 있다. ▲ 서울 재동 백송 (사진 문화재청 제공) 원산지인 중국 북경에서는 아름드리로 자란 거목을 흔히 볼 수 있다. 백송나무는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이 나무는늘 푸른 큰키나무로 잎이 3개씩 뭉쳐나는 삼엽송에 속한다. 나무의 색깔은 어릴 때는 회청색이며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껍질이 벗겨져서 점점 회청색으로 변해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 백피송(白皮松)이라 불린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고,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서울 재동 백송 (사진 문화재청 제공)
[그린경제 = 조기태 기자] 청송당은 성혼(1535~1598)의 아버지인 청송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별당이었다.청송당 이란 이름은 눌재 박상 (1474~1530)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북악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부친 성세순(1463~1514) 때 부터로 성혼은 조부 성세순 행장인「조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시사숙공 행장」에서 백악산 아래 집을 정하였는데 숲이 깊고 땅이 외져 자못 산수의 멋이 있었다. 공무를 마치면 지팡이를 들고 신발을 끌며 왕래 하였다. 계곡마다 두루 찾아다니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갈 줄 몰랐다 라고 사연을 밝혔다. 성수침이 본격적으로 이곳에 기거하게 된 계기는 1519년 기묘사화 때 스승이 처형 되고 선비들이 화를 입자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청송당을 짓고 제자 양성에 힘을 써서 많은 석학들을 배출하였다. 임억령(1496~1568)은「청송당기」에서 성수침의 청송당 생활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의롭지 않은 명성과 공명,부귀 따위는 썩은 쥐나 똥으로 보았다. 고고하게 누워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다 성수침이 죽은 뒤 1668년에 외손 윤순거와 윤선거 등이 다시 중건하여 송시열,남구만 등과
[그린경제 = 조기태 기자]청계천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원하여백운동계곡을 시작으로 청풍계곡 물과 수성동계곡 물이 합류해서 세종마을을 관통하여 서울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이다. ▲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 28개의 지류가 본류에 흘러들어 청계천을 이루는데, 그중 가장 멀고, 가장 길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지점에 2003년 종로구에서 발원지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인근에 창의문과 윤동주문학관, 최규식 경무관 동상이 있다. ** 조기태 : 세종마을가꾸기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