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40년 전 필름에서 되살린 이미지를 보다 보면 그때는 너무나 흔했던 풍경들이 돌이켜보면 지금은 되살릴수 없는 순간들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시대의 풍경은 그런 뜻에서 매력을 넘어 그 시대를 재해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 작가나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 모두에게 '진부함이 아니라 신선함' 으로 다가온다. 이번에 인천관동갤러리에서 10월 31일부터 전시하는 사진가 류은규 씨의 <[장날-소래와 담양> 전은 그가 40년 전에 찍은 필름을 스캔, 보정 작업을 통해 되살린 이미지를 정리한 것이다. 그 당시엔 너무나 흔했던 풍경인데, 이제 찾을 수 없는 순간들이 포착되어 있다.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급속히 달라진 시기가 바로 86년, 88년 때였다. 모두가 새로운 것을 구하느라 열심이었고, 낡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죄가 될까 봐 버리기에 바빴고, 짧은 시간 내에 우리 생활이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사진은 기억을 기록하는 도구인데, 필름이나 데이터를 버리거나 지워버리면 그 기록은 영원히 찾아낼 수 없게 된다. 오래된 필름을 습기나 먼지를 피해 잘 보관하고, 때가 되면 되살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소쇄원은 조선시대 중기 이땅에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였던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 전체를 성리학적 이상세계로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하여 자신이 태어나 살던 한적한 시골 고향땅에 조그마한 이상세계를 실현하며 살아왔던 조선시대 한 성리학자 삶의 이상향 이었다. 소쇄원을 세웠던 양산보는 조선 중기 신진 사대부로 이름을 날렸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신흥사림파를 대표하여 기존 세력인 훈구파와 다툼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함으로 정읍으로 유배되고 결국 임금의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사약을 받고 죽게됨에 따라, 조광조의 제자였던 양산보는 중상모략이 판치는 세상을 버리고 낙향하여 무등산 골짜기에 숨어살면서 맑은 계곡이 있는 이곳에 유유자적 자연인으로 살며 멋스럽게 살아온 자취를 후세에 그대로 남겨준 것이다. 소쇄원의 뜻은 '깨끗하고 시원한 정원'이란 뜻으로, 중국의 송나라시절 주자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꿈꾸며 무이산 계곡에 무이구곡을중심으로 무이정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던 것을 본받아 자신도 주자와 같은 은둔한 삶을 살면서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하며 살고자 하였다. 소쇄원은 계곡을 중심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대나무가 잘 자라는 담양은 옛부터 죽제품의 고장으로 죽세공품인 돗자리을 비롯한 대바구니 등 생활용품들이 생산되었던 대나무의 고향으로 유명하였다. 지금도 담양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죽녹원"이 있어 국내 유일한 왕대숲의 푸른 대나무의 꺾이지 않는 절개를 느껴볼 수 있어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곳이다. 죽녹원에 가면 옛 대나무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이런 담양에는 백제시대부터 창건된 절로 알려진 천년고찰이 있으니, 그 절은 용흥사이다. 그런데 오래된 절로 알려지긴 하였지만 조선 이전의 흔적은 찾기 어렵고 조선조 숙종(1674~1720)의 상궁이었던 숙빈최씨가 이 절에서 기도 한 뒤 영조를 낳았다고 하며, 영조가 등극한 뒤 이 절의 이름도 용구사에서 용흥사로 바뀌었다. 영조 이후 용흥사는 조선시대임에도 왕실의 도움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기울고 일본침략기를 맞이하게 된 19세기 말에는 일제와 싸우기 위하여 호남에서 일어난 죽창을 든 의병들의 본거지가 되어 일본군에 의하여 용흥사의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1930년 대에는 근처 백양사의 승려인 정신스님이 대웅전과 유사채를 세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