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난 30여 년 동안 증조할아버지 정한용 의병장의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위해 온 가족이 생업도 팽개치고 그 증거자료를 모으는 일에 매달려 왔습니다. 만석꾼이던 증조할아버지는 전 재산을 의병 항쟁에 쏟으셨으며 진주의병의 본주의소(本州義所)를 진두지휘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여러 우여곡절로 증조 할아버지의 포상 신청이 벽에 부딪혀 있던 참에 국립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의 도움으로 각종 증거자료를 심도있게 갖춰 이번에 포상 신청을 새로 하게되어 기쁩니다. 증조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포상이 하루빨리 결정되어 저희 유족의 한을 풀어주심으로써 아직도 포상 신청의 길이 막혀있는 의병 후손들에게도 큰 희망이 길이 열리길 간절히 빕니다.” 이는 어제(27일) 낮 2시, 광복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계기, 광복회·국립인천대학교 공동주최 <독립유공자 발굴 포상신청 설명회 및 학술발표회>에서 독립유공자 350명 포상신청자 가운데 유족 대표 중 한 사람인 정한용 의병장 증손녀 정현경 씨가 한 말이다. 어제 행사는 독립유공자 후손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회(회장 이종찬)와 국립인천대학교(총장 박종태)가 공동 주최하였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정부 관계와 무관하게 한국과 일본 양 국민의 감정적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신간이 있다. 출판사 '고래가 숨쉬는 도서관'이 각종 역사서와 자료를 종합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일제가 저지른 죄악 100가지를 시간 순으로 정리한 책, 《일본의 죄, 어디까지 아니?》를 출간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이 쓴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해야 하는 100가지 이유'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저자 박찬아는 일제강점기 연통제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르고 돌아가신 박원혁 독립지사의 손자다. 그는 현재 한일 간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과거의 일본이 아니라 과거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의 현재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사과해야 하는 자와 사과를 받아야 하는 자 모두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상호 사과와 용서를 해야만 진정한 화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쓴 이유라고 밝힌다. 이 책은 독립유공자 딸인 할머니가 우연히 만난 초등학생들에게 일본의 죄악상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내용으로 어린이들이 읽고 이해하기 쉽게 쓰였다. 또한 중요한 대목마다 작가의 한마디를 덧붙여 작가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시선을 독자에게 전하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는 “제105주년 3・1절을 맞아 충남 아산군 신창면에서 만세시위를 이끈 강달성 선생(애족장), 암살단 단원으로 친일파 처단에 앞장선 김화룡 선생(애족장) 등 103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라고 밝혔다. 강달성 선생은 1919년 4월, 충남 아산군 신창면 읍내리 학성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창면사무소 및 헌병주재소 앞에서 시위에 참여하고 신창보통학교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강달성 선생은 판결에 불복하는 한편 법정에서 “만세시위는 조선 민족의 정의ㆍ인도에 기초한 행동이므로 무죄”라며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히 밝혔다. 김화룡 선생은 1920년 3월 의열투쟁 단체인 암살단에 가입,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 내한을 앞두고 조선 전역에 독립의식을 드높이고자 독립운동 격문인 ‘암살단 취의서’ 약 4천 매를 인쇄ㆍ배포하고 시위를 준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와 함께 학생 신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선전활동에 참여한 이임창 선생(대통령표창), 독립운동 비밀결사 소척대를 결성한 한인택 선생(대통령표창), 일본 동경에서 비밀결사 무우단 단원으로 활동한 강증룡 선생(애족장)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27일) 낮 3시,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3층 대강당에서는 광복회(회장 이종찬)와 국립인천대학교(총장 박종태)간의 뜻깊은 업무협약식이 있었다. 이날 협약식은 발전적인 사업 부분의 협력자로서 ‘미서훈 독립유공자 발굴ㆍ포상신청 및 독립운동사적지 발굴ㆍ연구사업’ 분야에 서로 이바지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날 협약을 맺기에 앞서 박종태 국립인천대 총장은 인사말에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독립정신을 받들어 후손들의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애국 선양에 힘쓰고 있는 광복회야말로 민족대통합의 선도적 역할을 하고있는 애국과 독립의 상징적인 단체입니다. 한편 국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2023년 11월 현재 4,377명의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서훈 신청을 해온 국내 유일의 연구소입니다. 앞으로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과 독립운동사적지 발굴사업에 관한 학술적 자료와 연구 등 상호 긴밀한 교류를 통해 발전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이번에 광복회와 국립인천대가 업무협약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다년간에 걸쳐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에 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는 제84주년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워싱턴 회의’를 앞두고 만세 시위를 이끈 양일석 선생(애족장), 국내와 일본을 넘나들며 일본의 천황제와 식민 통치를 정면 비판한 민병구 선생(건국포장), 조선총독부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반대하다 옥중 순국한 최인규 선생(애족장) 등 67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 양일석 선생은 1921년 11월, 전남 목포에서 사립 영흥학교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군비 축소 관련 국제회의인 ‘워싱턴 회의’가 열리자, 한국 독립 문제의 상정을 촉구하기 위해 만세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징역10월을 선고받았으나, 법정에서 ‘독립운동은 평소 소신’이라고 당당히 밝혀 한인 청년의 넘치는 기개와 독립운동에 대한 변함없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민병구 선생은 1933년 부산에서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총독부의 민족 차별적 학교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교에 참여하다 무기정학을 받았고, 1939년 일본 야마구치 고등학교 재학 중 비밀결사(‘여우회’) 활동으로 체포되는 등 식민지하의 억압적 교육 환경 속에서 국내와 일본을 넘나들며 학생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최인규 선생은 1940년, 강원 삼척군에서 천곡교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가 간도로 이송하던 15만 원을 빼앗은 사건의 주역인 독립유공자, 윤준희(1963년 독립장), 임국정(1963년 독립장), 한상호(1963년 독립장), 김강(1995년 독립장) 선생을〈2023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라고 밝혔다. 함북 회령 출생(1895년)인 윤준희 선생은 중국 용정촌으로 이주하여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신학문을 수학했고, 영신학교(용정의 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계열의 민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민족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 서전서숙 :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1962년 대통령장), 이동녕(1962년 대통령장) 등이 한인 자제들을 교육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한 민족교육기관 한상호 선생(1900년, 함북 경성)은 중국 연길현 명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와룡소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하며 한인 청년들의 민족정신 교육에 힘을 썼다. 임국정 선생(1896년생, 함남 함흥)은 창동학교에 수학하며 민족의식을 길렀고, 독립전쟁을 위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일제와의 독립전쟁에 필요한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이동휘와 이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독립유공자 발굴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권칠승(더불어민주당, 화성시, 병) 의원이 화성시 독립유공자와 대구고보 반일 학생활동 유공자 발굴에 발 벗고 나선다.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시위와 반일 학생활동으로 인해 옥고를 겪은 화성시 출신으로 포상된 분보다 포상되지 않은 독립유공 대상자가 더 많다는 사실과 일제강점기 대구고보 학생으로 반일 학생활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겪은 분 중에 포상된 분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적극적인 독립유공자 발굴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독립유공자 미포상 발굴자 연구로 힘쓰고 있는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 이태룡 소장에 따르면, 현재까지 화성 출신으로 포상된 독립유공자는 29명인데 견주어 아직도 포상되지 않은 분은 35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한편,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이른바 ‘대구학생결사사건’의 경우 대구고보 학생 155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고, 40여 명이 붙잡혀 10달 동안 심문과 고문 끝에 예심에서 14명이 기소유예, 26명이 공판에 회부되어 1929년 12월에야 1심이 선고되었던 독립운동 사건으로 대구고보 반일 학생활동 중에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