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경기도 파주시 소령원길에는 사적 <파주 소령원 (坡州 昭寧園)>이 있는데 이는 조선 21대 영조(英祖) 임금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진 숙빈 최씨의 무덤입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가운데서도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는데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었던 훗날 경종 임금이 되는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 받으며 자랐습니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고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涕泗被面).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라는 글은 영조 임금이 어머니 숙빈 최씨 무덤의 돌비석에 쓴 <숙빈최씨소령묘갈(淑嬪崔氏昭寧墓碣)>의 내용입니다. 영조임금은 이렇게 묘갈문을 직접 썼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한 효성이 지극한 임금으로도 알려졌습니다. 1724년 병약하던 경종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조선 제21대 임금이 된 영조는 어머니 최 씨가 천한 출신으로 품계가 낮아 위패를 모실 수 없게 되자 무덤 지위를 소령원으로 높였습니다. 참고로 능(陵)은 임금ㆍ왕비 무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복식(服飾)에서 금(金)과 옥(玉)을 없앤 것은 바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아름다운 일이다. (가운데 줄임) 훌륭하신 검소한 덕(德)은 따라서 본받을 만하다. 연여(輦輿)에 금으로 그리는 것은 삽시간에 지워져 버리니, 다만 겉치레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비용이 또한 심하다. 태복시(太僕寺, 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관아)에 분부하여 이 뒤로부터는 금으로 그리지 말도록 하라." 위는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1751년) 2월 3일 기록으로 영조 임금이 연여에 금으로 그리는 것을 못 하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원래 연여는 연과 여(輿)로 나뉘는데 연(輦)은 임금이 거동할 때 타는 것으로 밑에 수레를 달아 말이 끌게 되어 있고, 여(輿)는 지붕이 없는 것으로 사람이 어깨에 메고 다는데 소여(小輿) 또는 평교자(平轎子)라고도 부릅니다. 조선시대의 연은 옥개(屋蓋, 위에 씌우는 덮개)에 붉은 칠을 하고 주홍과 황금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또 둥근 기둥 네 개로 작은 집을 지어 위에 올려놓고, 사방에 붉은 난간을 달아 겉에는 운룡(雲龍, 구름과 용 무늬)을 그렸고, 안에는 운봉(雲鳳, 구름과 봉황)을 그렸습니다.
[우리문화신문=윤지영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18세기의 영ㆍ정조와 함께 개혁을 이끌었던 재상 번암 채제공의 한글 행장 《번상행록》에 주석을 붙이고 현대어로 뒤쳐 펴냈다. 현재 남아 있는 《번상행록》은 19세기 한글 필사본으로,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다. 이 한글 필사본은 채제공의 한문 행장을 뒤친(번역) 것이며, 아쉽게도 한문 저본은 전하지 않는다. 한글 필사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책이 집안 여성들을 위해 선조의 행적을 학습할 수 있도록 특별히 작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글로 읽는 번암 채제공의 성공 이야기 번암 채제공은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된 시기, 임금의 정치적 비호를 받으며 남인으로서 재상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번상행록》은 영ㆍ정조 시대 정치적 탄압 속에서 재상으로 성장하는 채제공의 성공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번상행록》은 한글로 적혀 있지만 흘림체로 되어 있고 난해한 문구와 어휘가 많아 읽기가 쉽지 않다. 이에 《번상행록》을 교주(문장을 교정하고 주석을 붙임)하고 현대어로 번역하여 일반 독자들이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번역 작업에는 채제공의 한시를 전공한 한국고전번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선의 왕후(宣懿王后, 조선 20대 경종의 계비) 기일(忌日)’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아침 수라에 고기붙이로 만든 반찬이 있었는데, 눈이 침침하였기 때문에 분별하지 못하고 집어 먹었다가 토했었다.” 이는 《영조실록》 47년(1771) 6월 29일 자에 있는 기록입니다. 이를 보면 영조임금은 육고기를 싫어했음은 물론 과식을 피하고 매일 아침을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조임금은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임금이기도 했지만,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던 일 곧 “감선(減膳)”을 89차례나 했을 정도로 임금으로 해야 할 처신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감선은 권력 사이에서 신하들을 경고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감선이 아니라 아예 굶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또 영조는 자기 몸을 잘 섭생하여 81살까지 살았던 임금인데, 입맛도 까다로워 나이가 들수록 밥맛이 떨어지자 약간 짠 듯한 굴비와 톡 쏘는 갓김치, 매콤한 고추장이 입맛을 당긴다며 무척 즐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쌀밥보다는 보리밥을 즐겨 먹은 것은 물론 비린내가 나는 회와 생선은 절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 이것이 아마 인생 지도자[Leader]의 정의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지도자다.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 특히 한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임금이라면 어떨까? 자신의 결정에 나라의 흥망이 결정되고, 수백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면? 결정의 무게는 무거울 것이고, 수시로 두려울 것이다. 역사 속 그들도 그랬다. 앞서 그들이 내렸던 결정, 고뇌, 번민을 분석한 이 책, 《인생 리더》의 지은이 강관수는 역사 인문 리더십 강의 때 자주 소개하는 지도자의 조건과 요소를 열여덟 가지 주제로 나누어 제시한다. 1장 ‘역사가 들려주는 리더의 조건’에서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고대역사와 배경지식을 담았다. 2장부터 18장까지는 지도력의 유형을 성군, 애민, 혁신, 전략, 조직관리, 참여지향, 포용, 인내, 보필 등으로 나누어 공자, 세종, 영조, 정조, 이순신 등 역사적 인물의 사례를 통해 지도자가 갖춰야 할 품성과 역량을 보여준다. 예시로 분석한 인물들은 모두 한국 역사나 중국ㆍ일본 역사 속 인물들이다.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윤성용)은 2024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즉위 300돌을 맞이하여 특별전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12.8.-‘24.3.10.)을 연다. 영조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탕평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글과 그림’을 활용해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에 주목하는 전시다. 영조와 정조가 쓴 어필(御筆)과 두 임금의 의도를 반영해 제작된 궁중행사도 등 18세기 궁중서화의 화려한 품격과 장중함을 대표하는 54건 88점을 선보인다. *국보 1건, 보물 11건, 세계기록유산 5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건이 포함됨. 황극탕평이 필요한 상황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고 즉위하는 과정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신하들 사이 대립이 격화되었다. 즉위 뒤에도 ‘경종 독살설’을 내세우며 그의 왕위 계승에 의혹을 제기하는 무리가 있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영조는 국왕이 중심이 된 황극탕평(皇極蕩平)을 추진하며 균역법과 준천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 ‘탕평’은 싸움이나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뜻함. 유교 경전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조에 나오는 “무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