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온돌 문화는 우리나라의 아주 독특한 문화입니다. 바닥 난방을 중심으로 하는 주거문화의 한 형태로 한국인들이 기후 환경을 슬기롭게 활용한 삶의 방식이지요. 온돌은 다른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여서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합니다. 옛 선조들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있을 때 비교적 높은 곳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정자는 자연을 감상하면서 한가로이 놀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아담하게 지은 집으로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 있는 구조이지요. 우린 정자의 이름에 쓰이는 루와 각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루(樓)’는 주로 1층으로 하단이 뚫려있는 다락집 형태로 비교적 규모가 작고 ‘각(閣)’은 2층 이상으로 루보다 크고 웅장합니다. 서울 종로에 있는 보신각(普信閣)을 다르게 종루 또는 종각으로 불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요. 굳이 따져보자면 종각(鐘閣)이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자에 온돌을 깐 건물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왕의 거처인 경복궁 안에 있는 향원정이지요. 향원정(香遠亭)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의미로 주렴개의 애련설(愛蓮說)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향원정은 주로 왕과 왕실 가족들의 휴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 22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하동 칠불사 아자방 온돌>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칠불사의 ‘아자방(亞字房)’으로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선방(禪房)은 스님들이 벽을 향해 수행할 수 있도록 방 안 네 귀퉁이를 바닥 면보다 한 단 높게 구성함으로써 ‘亞’자 모양의 아자형(亞字型) 방 전체에 구들을 놓아 만든 온돌방인데 한 번 불을 지피면 온돌과 벽면의 온기가 100일 동안 지속된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아자방 온돌은 신라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2017년 진행된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고려시대의 유물인 기와 조각, 기단석(基壇石,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로 쌓는 돌), 확돌(홈이 파여 있는 돌, 아궁이 문을 고정하는 용도) 등과 함께 기타 여러 기록 자료에 따라 아자방 온돌은 선종사찰(禪宗寺刹)의 선방으로서 그 기능을 유지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옛 선비들이 지리산을 여행하고 남긴 각종 지리산 유람록, 일제강점기 발행됐던 신문 기사 등 당시의 자료들을 통해서도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지요. 칠불사(七佛寺)는 지리산 반야봉 남쪽 자락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뜨끈뜨끈 온돌의 맛’이라는 주제로 이야기주제공원(스토리테마파크) 누리잡지(웹진) 담(談) 2024년 1월호를 펴냈다. 혹독한 겨울날, 우리의 선조들은 온돌을 통해 어떻게 추위를 녹였는지 살펴본다. 양반이 온돌을 깔자 청계천이 범람하다 <구들을 덥히자 청계천이 범람했다>에서 김소라 교수(경인교대)는 17세기 조선 임금의 침소부터 온돌이 깔리면서 달라지는 조선의 풍경을 담았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17세기에 소빙기의 여파가 극심했다. 조선은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1671)과 숙종 때의 을병대기근(1695~1696)은 모두 황충(메뚜기) 피해, 냉해, 가뭄, 홍수 등의 피해로 조선 백성들은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당시 주거환경은 온돌과 비슷한 난방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으나, 따뜻한 바닥의 좌식 생활은 줄곧 하층민의 생활양식으로 여겨졌다. 상류층은 최소 조선 전기까지 입식 생활을 주로 영위하였고, 난방은 화로 등을 활용했다. 조선에서 가장 뒤늦게 온돌을 일상화하게 된 공간은 궁궐이었다. 소빙기의 여파로 인조 때 궐내 온돌 증설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며 궁궐에도 온돌이 설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