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황이 고향에 돌아가 누차 상소하여 나이가 들었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병이 들었는데 아들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가 틀림없이 관례에 따라 예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할 것인데, 너는 모름지기 내가 죽으며 남긴 뜻이라 말하고 상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라. 그리고 묘도(墓道)에도 비갈(碑碣,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글자를 새겨 세우는 것)을 세우지 말라.‘ 하였다.(가운데 줄임) 그로부터 며칠 뒤 죽었는데 준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위는 《선조수정실록》 4권, 선조 3년(1570년) 12월 1일 기록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죽음에 관한 얘기입니다. 조선조 중기 명종과 선조 때 살았던 퇴계 이황(1501~1570)은 평생 올바른 인간의 도리를 추구하며 학문과 수양,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아 마침내 최고의 유학자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이가 들자,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벼슬을 사양하려 했고, 죽기 전 아들에게 나라에서 조의금이나 장례용품 주면 사양하고 받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지요. 요즘 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사품 벼슬) 구치곤(丘致崐)이 아뢰기를, "지금 중의 무리들이 일을 하지 않고 놀면서 먹고 있으니, 백성에게 해독(害毒)을 끼치는 것이 심합니다. 이들을 군대에 편입시킨다면 군사가 어찌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평안도(平安道) 백성 가운데 중이 된 사람은 다른 도(道)보다 곱절이나 되니, 청컨대 모두 찾아내어 군대의 정원(定員)에 편입시키소서." (가운데 줄임) "지난 정해년에 호패(號牌)를 시행하였을 때도 중의 무리가 30여 만 명이나 되었으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지금은 거의 40여 만 명이나 될 것입니다.“ 위는 《성종실록》 111권, 성종 10년(1479년) 11월 29일 치 기록입니다. 중의 무리가 40여 만 명이나 돼 군사가 넉넉하지 않다고 하며, 중들을 군대에 보내도록 하자고 합니다. 불교의 나라 고려와 달리 조선시대가 되자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바뀌면서 불교를 탄압하고 이에 따라 따라서 불교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262칸에 달하던 대가람 경기도 양주 회암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융성하였습니다. 다만, 그렇게 번영했던 회암사는 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004년 6월 4일부터 쓰기 시작한 ’우리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가 드디어 20해를 넘어 다섯즈믄(5천)째가 되었습니다. 엊그제 즈믄이 넘고 3,333째가 되었는가 했는데 벌써 한 골(일만)의 반이 되었습니다. 17해(년) 넘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날마다 쓰다가 지난 2021년 제가 뜻하지 않게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잠시 쓰지 못했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2~3 째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문화에 대단한 슬기로움이 없던 제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추임새가 멈추지 않았던 덕이 가장 컸다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특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독자 온(백) 여분의 성금, 말틀(전화), 카톡, 번개글(이메일)을 통한 추임새는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글로나마 엎드려 큰절을 드려 마지않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우리문화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문화가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것임을 한분 한분께 알려드릴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언론에 “사상 최악의 폭염…온열질환ㆍ가축폐사 잇따라” 같은 기사가 나오는 요즘입니다. 최근 온열질환자 수가 2,900명에 육박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수준으로 집계됐으며, 불볕더위에 폐사한 양식장 어류와 가축은 667만 마리에 이른다고 합니다. MBC뉴스에 나온 한 배달노동자는 "지옥이 있다면 이게 지옥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바닥이 너무 뜨겁습니다."라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열넷째 처서(處暑)입니다. 불볕더위가 아직 맹위를 떨쳐도 오는 가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흔히 처서를 말할 때 ’땅에서는 가을이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치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드는 때입니다. 처서 무렵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담처럼 해충들의 성화도 줄어들고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볕더위에 고생하고 있지만, 처서 무렵의 날씨는 한 해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때로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쬐는 하루 땡볕에 쌀이 12만 섬(1998년 기준)이나 더 거둬들일 수 있다는 통계도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인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은 저 악명높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정”을 맺습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전쟁부 장관 윌리엄 태프트 사이에 오간 식민지 경영 밀약입니다. 미국은 일본에게 러시아를 견제해달라고 하면서 대신 조선 침략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다리인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아시아 패권구도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 결과, 조선은 미국의 도움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미국과 일본은 채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걸쳐 모두 네 차례의 협정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몇 번씩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밀약을 맺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는 훗날 27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가쓰라 다로(かつらたろう[桂 太郎] 1847~1913)는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시기에 이르기까지 총리대신을 지냈으니 미-일의 동아시아 제국주의 동맹체제 역사는 오래 지속된 것입니다. 이후 아시아-태평양 전쟁 종전이 있은 1945년 뒤 제2의 가쓰라-태프트 체제는 복원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으니 관계된 것이 매우 중합니다. 쌀의 품질이 세 가지가 있는데 각기 쓰이는 바는 달라도 모두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근래에는 인심이 교묘하게 속이기를 잘해서 오직 더 남겨 이익 취할 것만 도모하여 모든 쌀에 모래를 섞는데, 시전(市廛)이나 마을에서 거리낌 없이 통용합니다. 비록 날마다 금하여 다스리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여 중지하지 않으므로 만약 엄하게 금지 조항을 세우지 않는다면, 징계하여 단절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7월 19일 치 기록으로 명종이 쌀에 모래를 섞어 파는 미곡상을 엄히 다스릴 필요가 있다는 사헌부의 청에 그렇게 하라고 전교한 내용입니다. 현대에는 일반미를 인기가 좋은 경기미로 포장을 바꾸는 일이나, 중국산 쌀을 국산 쌀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벌어져 미곡상이 처벌받는 일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엔 얼마나 먹거리가 부족했으면 쌀에 모래를 섞었을까요? 조선시대 대부분 가난한 백성은 가뭄과 큰비로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이 없어 흙까지 먹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백성의 굶주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가장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잡기(雜技)의 피해는 투전(投錢)이 특히 심합니다. 위로는 사대부의 자제들로부터 아래로는 항간의 서민들까지 집과 토지를 팔고 재산을 털어 바치며 끝내는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게 되고 도적 마음이 점차 자라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경외에 빨리 분명한 분부를 내리시어,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금법을 어기고 죄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시고, 투전을 만들어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자도 역시 엄히 금지하소서. 위는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1791) 9월 19일 기록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투전 말고도 골패, 바둑, 장기, 쌍륙, 윷놀이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조 때의 학자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보면 투전은 명나라 말기에 장희빈의 당숙인 역관 장현이 북경에서 들여왔다고 되어 있어 투전이 우리나라에 보급된 것은 조선조 숙종 때부터인 듯합니다. 투전은 처음에 중인 이하의 계층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양반 계층에까지 확산하였지요. 원래 투전은 투기성이 강한 노름이 아니었는데 점차 오락성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15년 5월 4일 자 매일신보에는 국산 맥주광고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삿ᄲᅩ로 맥주와 아사히 맥주로 일제였지만, 일본과 조선을 하나로 하여 국산(國産)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1933년 5월 6일 자 동아일보에는 조선과 일본을 똑같이 짙은 색으로 표시하여 조선은 일본의 영토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광고는 “동양의 맹주 일본! 동양의 명주 사쿠라”라고 광고문구를 썼고 이는 결국 사쿠라 맥주를 마시면서 조선은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려는 흉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광고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조선으로 들여오면서 삽화나 광고문구를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조선에서 광고함으로써 광고 본래의 기능보다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구실을 한 것입니다. 드디어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위하여 1937년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뜻으로 내건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치달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1923년 9월 25일 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을 사랑하시는 동포는 옷감부터 조선산을 씁시다. 처음으로 조선 사람의 작용과 기술로 된 광목”이라는 경성방직주식회사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매일 아침 <날마다 쓰는 우리문화편지>라는 이름으로 따끈따끈한 한국문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번개글(이메일)로 전달해 주는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 소장이 《한국인이 알아야 할 한국문화 이야기》 책을 냈습니다. 2023년 5월 15일 쓴 머리말을 보니 우리문화편지는 올해로 4,800회가 넘었다고 하네요. 그 뒤로도 우리문화편지는 계속 쌓여가고 있을 테니, 정말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런데도 김 소장은 아직도 ‘목이 마르다.’라고 합니다. 크으~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이면 그동안에도 이를 엮은 책이 있지 않았을까? 예! 그렇습니다. 《하루하루가 잔치로세》와 《키질하던 어머니는 어디 계실까?》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이번이 4번째 펴낸 책입니다. 김 소장은 이번에는 164편의 한국문화편지를 8장의 주제로 나누어 책에 실었습니다. 곧 1. 명절과 세시풍속, 2. 세시풍속과 철학, 3. 입을거리(한복과 꾸미개), 4. 먹거리(한식과 전통주), 5. 살림살이, 6. 굿거리(국악과 춤), 7. 배달말과 한글, 8. 문화재, 이렇게 8개의 장입니다. 그리고 글마다 삽화를 넣었는데, 대부분의 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이야 상자와 가방을 주로 쓰지만 예전 사람들은 보자기를 일상적으로 썼는데 그 가운데 ‘조각보’는 예술 작품의 하나로 승화될 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방향이나 마름모형처럼 정형화된 무늬는 궁중이나 지체 높은 사대부집에서 사용한 조각보에서 주로 나타나고, 일반 집에서는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옷감을 이용하다 보니 삐뚤삐뚤한 무늬로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옷감 값이 비쌌기에 옷감 조각 하나도 버리기 아까웠을 테고 여인들이 직접 옷감을 짜는 일이 많다 보니 남은 옷감을 허투루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자투리 옷감을 그냥 버리지 않고 만들어 낸 것이 조각보였으니, 자투리를 모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옛 여인들의 정성과 예술감각이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이렇듯 조각난 옷감을 잇는 행위에는 복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사 가운데 포목점을 가장 천히 여겼습니다. 그것은 옷감 장사처럼 옷감 찢는 직업은 복을 찢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장 돈을 아무리 잘 번다고 해도 포목장사의 끝이 좋지 않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옷을 만드느라 자르고 찢은 옷감, 곧 복을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