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수원화성박물관은 15일 박물관 영상교육실에서 ‘정조대 무예 정책과 조선 도검’을 주제로 전시 연계 학술대회를 열고,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중심으로 정조시대 무예서 집대성 과정을 살펴봤다. 또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도검을 중심으로 도검 무예의 학술 값어치를 규명했다. 12월 15일까지 열리는 특별기획전 ‘임전필승! 조선의 무예서와 무예24기’와 연계해 열린 이날 학술대회는 주제 발표와 토론, 질의응답으로 진행됐다. ‘정조대 화성 방어체제 완성과 장용영의 군사 무예훈련’을 주제로 발표한 최형국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 전수교육 담당은 “정조대왕 재위 시기 화성 방어체제 확립과 장용영 창설은 정조의 친위 군사 세력 확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군 전체의 표준화된 전술체제와 무예의 확립을 이뤄낸 군사 개혁적 성격이 강했다”라며 “정조의 꿈은 화성 건설로 구체화됐고, 장용영 군사들의 무예훈련은 그 꿈을 풀어 나갈 실질적인 동력이었다”라고 밝혔다. ‘정조대 무인 백동수와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발표한 곽낙현 인문공감연구소장은 “백동수의 《무예도보통지》 편찬은 무예 실기를 통일된 기법으로 정리하고, 24가지 무예를 각 군영에 보급하는 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0월 9일은 578돌 한글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세종임금이 만든 훈민정음이 조선시대 내내 ‘언문’이라 하여 푸대접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임금이나 왕비 등이 한글 편지를 썼음은 물론 교지도 한글로 써서 사실상 한글은 많은 이가 쓰는 글자였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때인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선조임금은 공식 문서인 교지에 언문을 썼지요. 교지를 쓴 때는 왜군이 7백여 척의 배를 앞세워 부산포로 쳐들어와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조선은 왜군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속속들이 관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선조는 탄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조실록》 25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로 방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민간을 알아듣게 타이르도록 하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의 원활한 사맛(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또한 임진왜란 당시 백성의 상당수가 언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2022년 보물로 지정된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 한글박물관 소장)》은 정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직무대리 윤도식)은 소장품 자료집 《책가도ㆍ문방도》를 펴냈다. 자료집에는 민속박물관이 오랜 기간 수집해 온 책가도와 문방도 가운데 민속 생활용구로써 값어치가 높은 책가도 4점과 문방도 23점 모두 27점을 골라 수록하였고, 그 가운데 17건에 대한 물감 분석자료도 담았다. 이번 자료집은 지난 2005년 펴냈던 《민화와 장식 병풍》 이후 18년 만에 펴내는 소장회화 자료집이다.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책가도ㆍ문방도를 화풍과 재료 등 다각도로 분석한 글과 분석자료 실어 자료집은 크게 두 개의 장과 부록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장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책가도ㆍ문방도를 도판과 함께 소개하면서 한국 회화사의 흐름 속에서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이 갖는 특징을 살폈다. 도판의 구성은 크게 책가도와 문방도로 나누고 책장이 그려진 것만을 책가도로 이름 붙이고 그 밖에 문방을 주제로 한 것은 문방도로 구분하여 실었다. 문방도는 그려진 소재와 형식에 따라 책과 기물을 분산하여 그린 문방도, 소형 가구와 서책과 기물을 함께 그린 문방도, 문방도와 다른 화목을 함께 그린 문방도 등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특징을 살폈다. 둘째 장은 책가도의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윤성용)은 2024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즉위 300돌을 맞이하여 특별전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12.8.-‘24.3.10.)을 연다. 영조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탕평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글과 그림’을 활용해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에 주목하는 전시다. 영조와 정조가 쓴 어필(御筆)과 두 임금의 의도를 반영해 제작된 궁중행사도 등 18세기 궁중서화의 화려한 품격과 장중함을 대표하는 54건 88점을 선보인다. *국보 1건, 보물 11건, 세계기록유산 5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건이 포함됨. 황극탕평이 필요한 상황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고 즉위하는 과정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신하들 사이 대립이 격화되었다. 즉위 뒤에도 ‘경종 독살설’을 내세우며 그의 왕위 계승에 의혹을 제기하는 무리가 있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영조는 국왕이 중심이 된 황극탕평(皇極蕩平)을 추진하며 균역법과 준천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 ‘탕평’은 싸움이나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뜻함. 유교 경전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조에 나오는 “무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최만리를 비롯한 대다수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창제했어도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이 언문이라며 외면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해지는 문헌을 보면 임금부터 왕실 어른들은 한글로 편지를 썼음을 알 수 있지요. 또 이렇게 왕실이 한글편지를 썼다면 사대부 벼슬아치들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정조임금은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썼던 임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조가 만 3~4살부터 46살 때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인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보낸 한글편지 16점을 모아 묵은 편지첩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이 그 확실한 증거입니다. 《정조국문어필첩》에 보면 5~6살 무렵 쓴 한글편지의 내용에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기를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고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이라고 되어 있어 어린 정조의 의젓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에겐 선조가 옹주에게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