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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입구의 안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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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 주 출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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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외곽문의 2층문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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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의 외곽 주변으로는 자연석 담장으로 둘러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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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 앞에서 본 행궁 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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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에 오르는 계단에서 본 외곽문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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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의 외행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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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행전에서 본 행궁출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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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행전 내부의 임금옥좌,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진 병풍이 둘러쳐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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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행전 처마와 행궁출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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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의 안쪽에 자라는 느티나무에 가을이 익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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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과 가을하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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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본 행궁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가을이 물들어가는 10월이 시작되었다. 서울 근교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에 걸쳐있는 남한산성의 중심지로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이 된 남한산성 행궁에 들러 보았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고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이곳에 도읍을 정한 것은 백제였다. 지금도 백제시조 온조를 기리는 온왕묘와 숭열당이 있다. 백제는 남한산성이 있는 이곳의 근처에 몽촌토성, 풍납토성, 이성산성을 쌓고 백제의 전성기를 보냈다. 지금도 숭렬전에는 온조대왕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5일이 되면 제사를 모신다.
이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때에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백제가 밀려서 개로왕이 전사한 뒤 한강유역과 이곳 남한산성을 잃고 백제의 국력이 떨어졌다. 절치부심하던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한강유역을 되찾는 듯 했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결국 한강유역을 되찾지 못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하여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이곳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산주로 지장한뒤, 토성을 쌓아 군사요충지로 가꾸었다. 이후 신라는 나당 연합군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당나라의 야욕을 물리친 곳도 바로 이곳 남한산성이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군사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은 늘 있었지만, 조선시대 임진왜란에는 서산대사도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들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찬탈하였으나, 이후에 논공행상에 불만이 쌓여갔다. 이때 공신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이르켰을 때, 한양의 근처인 이곳 남한산성이 제대로 복구되지 못하자 행궁으로 제역할을 할 수 없어 인조는 공주까지 피신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상 하였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인조는 남한산성의 보수하고 축성하는 일을 승군도총섭인 벽암 각성대사로 하여금 2년 5개월간 축조토록 하였다.
조선은 숭명배금정책으로 대립하다 신하의 예를 하지 않는다하여 후금의 침략을 받고는 인조가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추운 겨울을 이곳에서 지내다가, 지방에서 올라왔던 구원군들마저 청군에 패퇴함으로 결국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나라왕제를 향하여 9고두의 예를 다함으로서 조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임금이 다른 나라에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로 남한산성은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산성을 견고하게 보수축조하고 이를 지키는 일들을 승병들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이곳 남한산성의 주변에는 많은 절들이 있었던 것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개원사에 승군의 본영을 두고 그 승병의 장으로는 팔도도총섭을 임명하여 산성을 보수하는 책임을 지웠다. 스님으로 출가하는 것도 위법인 시대에 스님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 이 제도는 이후로도 계속되어 1895년 갑오경장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승번제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세계인들이 서울에 들러 찾아볼 수 있는 유서깊은 곳이 되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벽도 무너지고 행궁은 자취만 남긴채 폐허가 되다싶이 되었었다. 그 자리에는 민가와 식당들이 들어섰던 것을 다시금 정비하여 이제라도 옛날의 모습을 찾아서 복원된 행궁이 다행스럽기 그지 없다.
9월이 들어서 찬바람이 불더니 어느덧 행궁 안에 나뭇잎도 색깔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목이 되어 역사를 지켜본 느티나무 사이로는 파란 하늘과 행궁의 기와지붕과 고목의 어우러짐도 아름다웠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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