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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寧邊)의 약산(藥山) 진달래와 시인 소월 2

진용옥 교수의 통일생각 10

[우리문화신문=진용옥 명예교수]

북에서의 소월에 대한 평가

북에서 소월은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되었으나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 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조선문학사, 1956년) 그리고 김정은 시절 복권되었다.

그런 사실을 검색하면서 나는 한국의 인문학자 문학자들에게 절망한다. 그들에게 인문학은 있을지 몰라도 인문과학이 없기 때문이다. 세기적 천재 시인 소월의 사인에 대하여 작가적 상상력이 도를 지나치고 분단을 띄어 넘은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다. 다만 이런 단편적 정보를 짜깁기 하면서 안 사실은 소월시인은 북에서도 존경하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안중근 이후 동시에 존경 받는 인사는 내가 찾은 두 번째 인사이다.

 

《진달래꽃》초판본 등록문화재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시집은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에서 발간한 초간본으로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 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초혼’ 같은 토속적인 정서를 잘 절제된 가락 속에 담은 127작품이 수록돼 있다. 《진달래꽃》 초판은 두 가지인데, 그림 없는 표지의 '중앙서림' 문고판과 꽃 그림이 있는 '한성문고'판이 있다.

   
 

 

 

 

 
▲ - 한성도서과 중앙 서림 문고판 – 등록문화재 470-1[개인소장] 470-.2 배재학당

 

1981년 대한민국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2011년 문학 작품으로는 최초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2종 4점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있다.

 

현대문학작품 가운데 경매 최고가 낙찰

2015년 12월 '진달래꽃' 초판본이 1억35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한국 현대문학작품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는 소식이다. 한문을 중심으로 한 지역들의 수집가들이 물러나고, 한글세대들이 수집 일선에 나와 앞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4천만 원,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천 3백만 원에 팔렸다.

근대문학 초판은 대부분 1백 부 정도밖에 찍지 않아 남아 있는 수가 매우 적다는 점도 시집의 초판본의 매력을 더하고 있다. 경매에 나오는 판본은 중앙서림 판이다. 지난해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이 역대 최고가 7천만 원을 넘어섰다.

 

통일의 상징 진달래 꽂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최고 시어는 단연 진달래꽃이다. 북에서는 국목이 소나무이고 남에서는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국목에 준한다. 그렇다면 통일 한국의 미래 국화는 어떻게 될까? 북에서는 목련(木蓮)이요, 남에서는 무궁화가 국화이다. 이른바 남근북련(南槿北蓮)이다.

 

   
▲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출처-구글]

 

그렇다면 통일국화는 당연히 흡수 통일이면 무궁화요, 적화 통일이면 목련이다. 그리고 합의 통일이면 남근북련의 교잡 종으로 교배종을 찾아야 한다 [꽃으로 본 내나라” 전시에는 무슨 꽃이 있었을까?-⑤, 140707 참조]. 하지만 이는 가정일 뿐이고 제3의 꽃을 선택해야 한다면 남북한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진달래가 단연 선호도 영순위 일 것이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로 유명한 약산(藥山)에 진달래가 만발, 장관을 이루고 있다고 북녘의 누리집 '우리민족끼리'가 보도했다. [2005년 4월22일] 약산 동대는 영변군 영변읍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구룡강의 왼쪽 기슭에 솟아 있다며 "산봉우리들을 뒤덮은 약산 동대의 진달래꽃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라고 전한다.

"약산 동대는 봉우리와 바위, 울창한 수림, 철 따라 피는 갖가지 꽃과 유적들로 예로부터 '관서 8경'의 하나로 이름난 명승지"라며 "산마다 골짜기마다 진달래꽃으로 한 벌 덮이고 산기슭으로 흐르는 구룡강의 물 위에까지 꽃 그림자가 비쳐 연분홍색으로 봄 치장을 해 황홀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약산 동대의 유래와 절경, 유적ㆍ유물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 영변 읍성과 약산 동대

 

약산은 이 산에 약초가 많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며 동대는 영변이 과거 무주ㆍ연주ㆍ위주로 나뉘어 있을 때 무주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대(臺)라는 뜻에서 불리게 됐다. 약산 동대의 최고봉은 제일봉(해발 488m)이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거북바위를 비롯한 학벼루, 학귀암폭포 등은 경치가 빼어나다.

또 약산에는 조선 시대의 천주사, 고려 때 건립된 서운사는 물론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고 쌓았던 철옹성지, 북수구문터, 남문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어 약산은 "평북 영변 찾아 가자 / 약산 동대 찾아 가자 / 울긋불긋 무르녹는 / 봉이마다 진달래요"라는 '평북 영변가'의 구성진 노래 선율로도 유명하다고 덧붙였다.

영변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약 80km 거리에 청천강의 북쪽에 있으며, 그 강줄기인 구룡강이 군내를 가로 지르고 있다. 최고봉은 북부에 있는 향적산(805m)이다. 언덕에 둘러싸인 지형이다. 고구려ㆍ발해의 영역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연주(연산부)ㆍ무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연산도호부ㆍ무산현이 1429년에 양자를 아울러 영변 대도호부가 놓여졌다. 1624년에는 이괄의 난 무대가 된 역사의 현장이다

 

   
▲ 평양 개선문에 새겨진 진달래 무늬

 

글쓴이가 2005년 조선인공을 방문하고 개선문을 관찰한 바 개선문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로 1만500개의 돌조각을 썼다. 높이 27m의 진달래로 꾸며진 4개의 둥근 지붕의 출입구가 위치해 있다. 삥 둘러 모두를 진달래 무늬가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 숫자까지 헤아렸으나 그 숫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북에서도 진달래를 선호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흥렬의 바우고개와 진달래꽃

가곡 바우고개는 시집 진달래꽃에 버금가는 국민가곡이다. 이흥렬(李興烈 1909~1980)은 고향이 함남 원산(元山)이다 바위고개, 어머니의 마음, 꽃구름 속에 등의 가곡을 작곡했다. 1934년에 처녀작품집 《진이흥렬 작곡집》을 펴냈다. 이 작품집에 “바위고개”가 실려 있으며 일제항쟁기에 민족의 비운을 노래한 곡으로 그 애틋한 가사와 가락으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바위고개”(1934) (이서향 작사 / 이흥렬 작곡)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 즐겨 꺾어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 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작곡자 이흥렬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바위고개는 어디에 있는 고개입니까?”, 그는 이 질문에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고개이지만,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나라의 모든 국토가 바위고개입니다.”라고 답했다. <일제 항쟁기의 핍박 받는 국민들>은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던 머슴>으로 에둘러서 표현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 지명 가운데 바위고개는 여러 곳에 있다. 시와 노래라는 형식은 다르지만 소월의 시와 이흥렬의 바우고개의 진달래는 모두 조국을 상징하고 있다. 바위고개는 전국 어디서나 있는 고개이다. 그러나 원작자의 생애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 이흥렬 작곡 서향작가[사] 바우고개

 

바우고개의 원 작사자 이서향

최근 발행된 이문학회(以文學會) 회보 《이문회우》 제5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월북 연출가 이서향 씨 아내 백난영 씨는 "<바우고개>는 남편이 14살이던 1929년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다 지은 것으로, 훗날 남편의 친구인 이흥렬씨가 작곡해 주었다는 얘기를 남편으로부터 들었다."라고 밝혓다.

작사가가 이서향에서 이흥렬씨로 뒤바뀐 것은 이서향의 월북 이후부터다. 이후 나온 모든 음악서적에는 <바우고개> 작사자가 이흥렬로 바뀌어 있다. 흔히 말하는 금지곡이 될까 해서이다. 이서향(李曙鄕, 본명 이영수-李榮秀 1915년 ~ ?)이다. 후에 이흥렬이 여기에 곡을 붙여 1934년에 낸 첫 작곡집 《이흥렬 작곡집》에 발표했다.

 

원작자 이서향의 변신과 숙청

이서향은 일본 유학후 돌아와 극작가 겸 연출가로 이름을 날렸고 1948년 ‘남북협상’ 때 북에서 남았다. 미모의 여배우와 함께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서향의 부인이었던 백난영(白蘭英 2015)씨는 6.25때 남에서 만났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뤘다는 증언도 있으니 도피성 월북은 아닌 듯하다.

일본대학에 유학하면서 안영일, 이화삼 등과 함께 극단을 구성하여 연극 운동을 시작했다. 1932년 귀국 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해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제방을 넘은 곳〉을 당선시켜 정식 등단했다. 대표작으로 1936년 발표한 희곡 〈어머니〉가 있고, 소설 작품 〈밤차〉(1936)와 〈초연기〉(1937)도 남겼다. 작품 경향은 식민지 현실의 모순 인식에 중점을 두는 편으로 계급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일제항쟁기 말에 친일 연극인 단체 ‘협동예술좌’에 가담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박영호의 〈산돼지〉를 연출해 출품하였으며, 1945년 열린 제3회 연극 경연대회에서는 박영호의 〈별의 합창〉, 임선규의 〈상아탑에서〉를 연출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 인명사전 수록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광복 후 좌익단체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입하고 희곡부 위원장을 지냈으며 조선연극건설본부, 조선연극동맹을 창립해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던 중,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38선 이북에 그대로 머물러 월북 작가가 되었다. 탁월한 연출가였다. 이후 북에서 국립예술극장 총장을 지냈으나, 1959년[1967년] 복고주의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했다고 전한다.

작사자 이서향은 일제항쟁기에는 친일파 광복 이후는 좌익 작가 그 다음 북에 가서는 종파분자로 낙인 찍혀 생을 마감했다. 굴곡진 일생이었다.

 

   
▲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출처-구글]

 

맺음

진달래는 8도 강산에 두루 두루 피는 민족의 꽃이다. 남북인을 통틀어 모두가 선호하는 꽃 으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 할 것이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나 바위고개의 진달래는 민족의 애환을 담아 놓은 상징이다. 글쓴이는 통일의 상징꽃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븍녘 누리집이 소개한 약산 동대와 영변 읍지에 나타난 약산을 찾아보면서 그리고 구글을 검색하면서 무수하게 진달래꽃 사진을 찾았다. 진달래는 통일의 상징 꽃이기 때문이다.

 

진달래와 더불어 청북(충천강 북쪽)이라는 장소를 고정시켜 보면 우리 외침과 항쟁이 차열하게 맞 부닥친 역사의 현장이다. 서북인 홍경래의 항쟁은 거상 임상옥과 시인 감 삿갓으로 이어진 기묘한 인연을 낳기도 했다. 거란 군으로 참전했던 발해 유민과 고려에 망명해온 발해 유민은 청북에서 서로 칼을 겨누다가 수공으로 휩쓸려갔으며 6,25동란 중 청천간 전투에서는 항미원조[중국식 표현]에 동원된 중국 조선민과의 남부 고국민 사이에도 서로 총 뿌리는 겨누는 교전이 있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빈번히 연출된 현장이라 점이 몹시도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이곳 청북에서 또다시 동족을 겨누는 핵무기와 전략 미사일 발사기지가 모두 이 지 지역에서 개발되고 있다는 점이 못내 아쉬움이 든다.

참조

- 발굴 인터뷰 “문인의 유산, 가족 이야기” ⑥ 김소월의 손녀 김은숙- 월간조선
- 북 주간지 “문학신문”[1966년 5월10일부터 7월2일]
- 《이흥렬 작곡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