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운선 교수] 우리나라 일부 청소년들은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평생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부모들이 이 말을 들으면 매우 섭섭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청소년들은 오히려 부모들이 존경받을 만한 일을 했느냐고 반문한다. 이 말에 부모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이 이처럼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부모가 지녀야 할 이성적 권위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존경심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삶의 지혜를 일깨워 준 데 대한 고마움에서부터 우러나온다. 따라서 우리의 부모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까닭은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데 힘쓰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성적 권위를 부모들이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성적 권위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영혼 속에 부여되어 있지는 않다. 그 능력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지점에 이상적인 목표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자녀를 위한 이성적 권위에 대한 인식을 부모들은 새롭게 해야 한다. 따라서 자녀를 위한 이성적 권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모로서 자신의 인생 자체에 걸려 있는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열등감, 분노, 슬픔 그리고 부모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 습관 등을 탐구하면서 그러한 것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부터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자녀에 대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부모 자신부터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이성적 권위를 찾을 수 있다. 이성적 권위란 자녀에 대한 애정관계가 달콤한 꿈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 영혼 전체에 대한 도전과 시련의 세계이다.
이제 부모들은 자녀의 진실한 행복과 자녀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내 자녀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눈을 감고 내 자녀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외로울 때마다 ‘어딘가에 너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모로서의 이성적 권위를 찾는 길이다. 다음은 어느 의사의 진실한 고백과 어머니에 대한 진정한 참회가 담긴 글이다.
▲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양아버지는 죽고, 양어머니는 다치고(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제 어머니는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파셨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매일 시장 귀퉁이로 나가 나물을 팔던 어머니, 그러나 저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있어 시장 근처를 지나는 일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시장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 다리까지 불편한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저는 솔직히 말해 초라한 어머니가 정말로 싫었던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궁색한 살림과 가난 그리고 초라한 어머니가 정말로 싫었습니다. 원래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사장판에서 막노동을 하시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한쪽다리를 다치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시장바닥에 나가 나물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라한 엄마와 가난이 싫어 더욱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제가 이토록 초라하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공부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머니가 절룩거리는 몸으로 학교로 찾아올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면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아버지, 어머니처럼 초라한 삶은 살지 않겠다,’ 결국 저는 의사가 되었고 어릴 때의 소원처럼, 어머니와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헤어진 저는 매달 넉넉한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보내는 것으로 아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구질구질한 지난날이 떠오를까봐 어머니를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모교의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저를 맞아주신 분은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뒤에도 선생님은 가끔씩 어머니를 찾아가 안부를 물으셨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눈을 감고 조용히 계시던 선생님께서 조용히 입을 여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하지만 정말 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었지, 어느 날 그 부부는 포대기에 쌓여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했어. 가난한 부부였지만 그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그 아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키웠지. 늘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부부는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곤 했단다. 그러다가 일이 터진 거야. 포대기에 쌓여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기 위로 철근더미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지.
부부는 급한 마음에 아기를 구하겠다고 달려들었어. 결국 남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내는 다리를 다쳤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전혀 다치지 않았단다. 그 아이가 누군지 알겠니? 바로 자네야.”
저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아무리 울어도 저를 키워주신 저의 어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저는 그걸 알면서도 저의 눈물은 계속 흘러내립니다. 그러나 결코 그 눈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 이도환 -
인간은 누구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의 세계를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 사이 사랑이라는 세계 속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개인차가 존재한다. 사랑의 세계는 행복이나 화합보다는 갈등이나 불행, 고통을 더욱 많이 수반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사랑에는 애착, 독점, 질투, 증오, 갈등, 배반, 복수, 잔인, 희생 등등의 부정적인 인간의 감정과 삶의 태도들이 항상 수반되고 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육체적 ‧ 정신적 조건을 갖고 태어난 이상,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애정문제는 생명체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자녀에 대한 애정문제는 결코 회피되거나 초월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자녀에 대한 애정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고독한 삶 속에서 화합과 빛의 장이 될 수도 있고, 갈등과 고통으로 점철된 암흑의 세계 속으로 영원히 들어갈 수도 있다. 이제 자녀에 대한 애정문제는 결코 갈림길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로서 이성적 권위를 어떻게 살려나가야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