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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평화통일 불사리탑사, 화해와 용서로 통일을

   
조천대로에서 본 불사리탑사의 일주문 모습

 

   
불사리탑사의 안쪽에서 본 일주문

 

   
푸른 초원같은 배경에 비쳐본 불사리탑사

 

   
불사리탑사의 본전에서 북쪽 조천 앞바다를 바라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

 

   
불사리탑사의 본전 상부 돔의 동서남북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감실로 조성되었다. 상부 상륜에는 7층의 탑을 안치했다.

 

   
불사리탑사의 본전으로 최근의 건축자재인 콘크리트와 돌(화강석과 제주화산석)로 지었다. 불사리탑사는 평면은 원형이고 지붕은 돔형으로 원과 돔은 완성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한민족의 염원이 통일이라지만, 그것도 전쟁이 아닌 평화적으로 해야만 한다는 의미가 표현된 것이다.

 

   
평화통일 불사리탑사를 이곳에 건립한 사연을 담은 표지석.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아래서 살았던 고승들이 유생들의 핍박을 받아 갖은 고초를 당하고, 제주로 귀양까지 와서 고문을 받다가 죽어갔던 곳에 세워진 평화통일불사리탑사.

 

   
불사리탑의 본존이 모셔진 3층에서 본 조천진 앞바다와 마을모습. 허웅당 보우대사와 환성당 지안대사가 순교한 곳에서 한 많은 제주 조천진 앞바다를 보고 있다.

 

   
불사리탑사의 모습. 만다라를 연상하며, 인도의 산치대탑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산치대탑은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 사리들을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한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그 한 조차도 용서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는 뜻으로 평화통일를 바라는 한 스님이 평화통일불사리탑사를 세웠다.

 

   
주변 유채꽃 밭에서 본 불사리탑사. 그 한 많은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이면 여지없이 유채꽃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대로에서 본 불사리탑사. 야자수가 자라는 언덕과 아름다운 불사리탑사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시대는 길고긴 500년 동안 불교는 무척이나 핍박을 받았다. 그 후반기인 정조시대부터는 서역에서 들어온 천주교인들도 핍박을 받았지만, 불교는 조선시대 처음부터 망하는 끝까지 핍박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런 상황속에서도 불교를 이끌던 스님들이나 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은 그 핍박에 대하여 한번도 저항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살아왔다. 심지어 민란이 발발하여도 스님들은 한번도 동조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처님의 대자비를 실천하는 불자의 도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언젠가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또 다시 인정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데, 그런 유래가 없는 세월을 겪는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염불만을 숙명처럼 여기며 불도를 닦던 스님들이 분연히 일어서서 왜적들과 싸웠고, 아이러니하게도 육지에서의 최초의 승리는 관군도 유생들이 일으킨 의병도 아닌 스님들의 승병이었다. 승병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선조는 스님들 중에 가장 존경받던 서산대사 휴정을 8도 승병도총섭으로 임명하여 전국의 스님들을 의승병으로 동원하고 통솔하게 하였고, 스님들은 그 동안의 멸시와 핍박에 대하여 한 번도 사과나 처우개선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왜적을 몰아내는데 최선을 다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유생들이 일본으로 가지 않으려하자 전쟁의 최후 협상외교를 왕을 대신하여 사명당 유정이 건너가서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는 일본에 가서도 많은 이적을 남기고,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제주 조천진은 조선조에 육지로 오고가는 배들이 드나들던 큰 항구였다. 그래서 육지로 오가는 각종 곡물 특산물 세금은 물론이고 육지에서 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곳 조천진을 이용하였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 명승이었던 허웅당 보우대사나 환성당 지안대사도 제주로 오는 그 길목은 이곳 조천진이었던 것이다.

허웅당 보우대사는 조선 중기 불교의 중흥을 꾀하다가 모함에 빠져 이곳으로 귀양와서 당시 제주도 목사사였던 변협의 모진 고문에 죽어갔고, 환성당 지안대사 또한 혹세무민하게 불도로 백성들을 현혹한다는 유생들의 모함에 걸려 이곳으로 귀양와서 죽어갔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하여 최근에 법화정사를 창설한 도림스님이 원력을 세워 조선조에 억울하게 죽어간 두 대사의 공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황량한 이곳에 터를 다져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조선시대에 참혹하게 죽어간 2대사의 공적을 기리며 이 절을 세웠으니, 이는 이분들의 억울함만을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니요, 현재 한민족의 평화통일까지 기원한다는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

억울함을 당한 사람은 누구나 그 억울함을 되갚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억울함을 당했다고 그것을 되갚는다면  세상은 하루도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이고, 늘 자신의 억울함만은 기억하는 중생들은 전쟁이 끝날 날이 없는 것이기에,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부처님의 대자비로 내가 먼저 용서하면 이제부터 전쟁도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대자비의 정신의 실천이 바로 조선시대 그 억울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번도 스님들의 반란이 생기지 않은 이유다. 마찬가지로 한민족이 이념으로 갈라져 남과 북이 서로 원수가 되었고, 지금도 가장 미워하는 대상이 다름아닌 우리 한민족의 남과 북일진대, 그런 가운데 우리가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줄곧 멸시와 핍박을 당연한 듯 받으면서도 살아남은 불교처럼 화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자세를 갖어야만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세운 절이 한국의 가장 남쪽 제주도 조천진에 세워진 평화통일 불사리탑사가 아닌가 한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