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9 (화)

  • 맑음동두천 32.0℃
  • 맑음강릉 33.9℃
  • 맑음서울 32.7℃
  • 맑음대전 32.8℃
  • 맑음대구 31.6℃
  • 맑음울산 31.0℃
  • 맑음광주 32.3℃
  • 구름조금부산 31.5℃
  • 맑음고창 33.1℃
  • 구름조금제주 29.9℃
  • 맑음강화 30.8℃
  • 맑음보은 30.5℃
  • 맑음금산 30.8℃
  • 맑음강진군 33.3℃
  • 맑음경주시 31.9℃
  • 구름조금거제 29.1℃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눈에 띄는 공연과 전시

유상호의 배뱅이굿에 푹 빠진 관객들

부평 국악전용극장 잔치마당, <유상호 배뱅이굿 완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왔구나, 왔소이다. 왔소이다. 불쌍히 죽어 황천 갔던 배뱅이 혼신이

    평양 사는 박수무당의 몸을 빌어, 입을 빌어, 오날에야 왔소이다.

    우리 오마니, 오마니, 어디 갔나요. 오마니, 오마니.”

 

무대에서는 평양 건달이 배뱅이혼을 불러오는 굿을 하고 있다. 어제 7월 25일 저녁 7시 인천 부평의 <전통연희단 잔치마당(대표 서광일)> 소극장에서는 국가무형유산 서도소리 이수자 유상호 명창의 ‘배뱅이굿’ 공연이 오승재 고수와 이서율 해금에 맞춰 펼쳐졌다.

 

‘배뱅이굿’ 하면 이은관 명창이 떠오른다고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은관 명창이 지난 2014년 세상을 뜬 뒤 국가무형문화유산 서도소리 배뱅이굿 전승교육사 박준영 명창과 서도소리 이수자 유상호, 박정욱 명창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특히 이은관 명창의 애제자, 유상호 명창은 인천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유상호는 배뱅이굿 전승교육사 박준영에게 소리를 다듬었는데, 그의 소리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간파한 박준영은 그를 이은관 명창에게 보내주었고, 그로부터 10여 년 소리 공부에 진력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배뱅이굿>의 이수자가 되었으며, 2002년도에는 전국 민요경창대회에 출전하여 대상을 받으면서 명창의 반열에 오른 바 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장 서한범 교수는 축하 말에서 “배뱅이굿은 알려진 명창이 너덧 명밖에 되지 않는데 그 가운데 인천은 전승교육사 박준영 명창과 오늘 공연을 하는 유상호 명창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배뱅이굿을 애호하는 시민들의 층이 아주 두터운 곳이다. 이제라도 인천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상호 명창은 인천무형유산 보유자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런 다음 통일이 되면 원래의 발상지인 평안도로 돌려줘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이날 공연은 극장의 객석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꽉 메워지고, 시작부터 끝까지 유 명창과 호흡을 함께 하려는 관객들이 손뼉으로 끊임없이 호응을 해주어 그 분위기는 어지간한 공연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의 분위기였다.

 

특히 유 명창은 이은관 명창의 유려한 배뱅이굿에게 익숙했던 관객들에겐 약간 모자람을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부른 소리의 청은 비교적 낮은 청으로 일관하여 톡톡 튀는 이은관이 아닌 안정감 있는 배뱅이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유 명창은 판소리에서 명창의 필수 요건이라는 발림 곧 소리꾼의 동작을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표현해 주어 관객이 쉽게 배뱅이굿에 빠져들어 헤어날 수 없도록 했다. 특히 배뱅이를 좋아하는 채독 속 상좌중의 몸짓, 박수무당이 세월네, 네월네의 손을 주무르는 동작에서는 관객들은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날 갈산동에서 친구 따라왔다는 성난영(57) 씨는 “친구가 배뱅이굿 공연에 간다길래 따라와 봤다. 그동안 이은관 명창밖에 몰랐는데 가까운 곳에 활발히 활동하는 유상호 명창을 보았고, 그분을 몰랐다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유 명창이 긴 시간 동안 걸쭉한 소리로 완창하면서 군데군데 맛깔스러운 몸짓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모습은 이분이 분명 명창임을 말해주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온 나라가 가마솥더위에 몸살을 앓는 요즈음이다. 이때 인천 부평 사람들은 국악전용극장 ‘잔치마당’ 공연장에서 유상호 명창의 익살스러운 배뱅이굿에 빠져 마치 탁족하는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여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