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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문무대왕이 용이 되어 드나들던 경주 감은사

경주 감포 대왕암과 감은사지 석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의 천년 서울인 경주에서 30여 km 동쪽 해안으로 가면 동해 푸른 바다에 닿게 된다. 이곳을 우리는 감포라고 부른다. 감포(甘浦) 앞 바다에는 해안과 300m 거리에 가깝게 작은 바위섬이 있는데 바로 대왕암이다.


이를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서기 681년 이곳에 신라의 문무왕을 모신 수중릉이기에 그렇다. 신라 문무왕은 치열한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왕으로 신라인들은 추앙한다.


그가  대업을 이룩한 뒤에도 신라의 해안가에는 왜구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변방을 약탈하고 어민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신라왕실은 이를 방비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왜구들은 해안가를 돌면서 약탈이 그치지 않았기에 문무왕은 자신이 죽기 전에 그의 아들 신문왕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나를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감포 앞바다에 있는 바위섬에 묻어다오. 그러면 나는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들을 모두 물리치겠노라." 이런 유언을 남기고 죽자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스님들처럼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석관에 고이 모셔 감포 앞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의 가운데를 다듬어 판 후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사찰을 감포 앞바다와 가까운 곳에 감은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창건한 감은사에는 용이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특이한 돌구조로 건축하였다.


그런데 그 감은사는 언제인지 모르게 폐사가 되었고, 돌로된 3층석탑과 용이 된 문무왕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특이한 구조로 지어졌다는 전설을 증명하듯 장대석 돌들이 발굴 조사결과 나타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렇게 문무왕을 수중릉에 모시고 감은사를 창건하여 불공을 드리자 왜구의 출몰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감은사 뜰앞이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농지이지만, 문무왕의 수증릉을 쓸 때에는 논밭이 아니라 바닷물이 들어오던 바닷가였던 것이다. 지금은  13.5m에 이르는 2기의 큰 3층석탑이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지만, 석탑의 조성연대가 확실한 몇 안되는 유적이며, 또 그 석탑이 신라3층석탑의 시원으로도 유명하다.


이 석탑을 더욱 가다듬어 신라탑의 정형인 불국사의 석가탑으로 발전하였으며, 이후의 모든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을 모본으로 조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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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