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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학자 김슬옹과 함께 떠나는 한글 여행

한글은 목숨이다-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기념관

한글학자 김슬옹과 함께 떠나는 한글 여행 4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울산 중구 병영1215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

 

울산 중구에는 2009년에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이 생겼다. 물론 생가터는 기념관 옆에 있다. 그 주변은 한글마을로 지정이 돼 기념관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온다면 울산 시외버스를 이용하거나 울산역에서 내리면 5003번 리무진 버스를 타고 기념관이 있는 병영사거리까지 30여분을 달리면 된다. 버스를 내려서 골목길을 천여 미터 올라가면 한글마을답게 한글 관련 각종 글맵시와 현수막이 눈에 띈다.

 

울산은 대표적인 공업 도시이지만 많은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빼어난 국어학자이자 올곧은 겨레 얼을 지키고 가꿔온 외솔 최현배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나 울산의 역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지역이 한글 마을로 지정된 건 2014년이다. 현재까지 한글 마을 조성을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더욱이 한글 마을 가까운 곳에 20158월에 시작한 한옥 마을이 조성될 예정이어서 한글 마을은 더욱 다함께 즐기는 마을이 될 것이다.


 



외솔 기념관은 지상 1, 지하 1층으로 저서, 유품 등을 전시하는 전시관과 다목적 강당, 한글교실, 영상실 등이 있다.

 

전시관은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제1전시실에는 외솔의 한평생이 각종 유품과 외솔 생전 모습을 재현한 조각상 등이 전시되어 있어 아이들이 외솔 생애를 생생하게 느끼고 신기해한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은 근엄해 보이고 교육자로서의 모습은 아주 자애롭게, 옥고를 치루는 모습은 비장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2전시실에는 우리말 큰 사전을 비롯하여 외솔 최현배 선생과 관련된 책자들이 전시되어 있어 마치 작은 도서관 같다. 그래서 외솔이 어떤 책을 쓰고 또 누가 외솔에 관한 어떤 연구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영상실에는 한글 창제의 과정을 볼 수 있는 영상부터 외솔에 관한 각종 기록 영화 등을 볼 수 있다. 체험실에서는 한글 놀이판과 탁본 체험 등을 직접 할 수 있어 우리말과 글이 어떻게 인쇄물이나 책으로 나오는지 체험하며 말글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외솔은 최현배 선생의 호이다. 올곧은 소나무의 기개로 살겠다는 의미로 지은 호이다. 외솔은 고종 임

금 때인 1894년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최병수 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생가가 외솔 기념관 위에 아담하게 복원되어 있다. 안채, 아래채, 부속채 모두 세 개의 초가집으로 이루어져 외솔 선생이 어렸을 때 어디서 어떻게 사셨을까 상상해 볼 수 있다.

 

외솔은 처음에는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4살 때인 1907년부터 면에 새로 차린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고 스물두 살 때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나라가 일제에 빼앗기던 1910년엔 외솔은 열일곱 살로 일반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말글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바로 우리말글을 통해 나라사랑을 일깨우던 주시경 선생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1913년 열세 살 때까지 주시경 선생이 세운 조선어강습원에서 우리말글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배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방학 때는 시골을 찾아가 우리글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곤 했다. 이렇게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과 문법을 배우면서 우리말글 학자이자 운동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큰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넓은 데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22살 때인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더 큰 세상을 익히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최현배는 1918졸졸, 좔좔과 같이 우리말의 정감이 잘 나타나는 시늉말(의태어) 연구로 졸업을 할 만큼 주시경 스승의 우리말 연구와 정신을 이어가고자 타국 땅에서도 애썼다.

 

최현배는 1919년 고국으로 돌아와 자유롭게 우리말글을 연구하고 가르치기 위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아 관비 유학금을 갚고 동래고보에 선생님으로 근무하며 그 뜻을 이어갔다. 또한 조선인 상권 확보를 위하여 공동 상회를 설립하는 등 지역 문화를 위해 애썼다.

 

스물일곱 살 때인 1920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 경남 사립 동래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서 수학하다가 서른두 살에 일본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한다. 1925년에 조선민족갱생의 도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민족운동가로 나서게 된다.

 

최현배가 유학을 완전히 마치고 귀국한 1926년은 훈민정음이 1446년에 반포된 지 480 돌이 되는 해였다. 이해 가을, 주시경의 우리말 사랑을 잇기 위해 만든 조선어연구회는 처음으로 한글날을 만들어 기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갸날이라고 하였다가 1928년부터 한글날이라 부른 것이다.



 서른세 살 때인 1926년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말 문법을 체계화하고 한글의 역사를 정리한 한글갈을 저술하고 한글을 통한 민족 운동에 앞장선다. 1932년 어느 식당 방명록에 남긴 한글이 목숨(사진)”이라는 말이 최현배의 한글 연구를 통한 나라사랑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개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해방 후에 풀려나 우리말글 연구와 운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 뒤로 1970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한글 교육과 한글 전용을 위해 몸바쳐 일했다.

 

1970년 돌아가실 무렵에는 한글기계화를 위해 주로 애썼다. 돌아가시기 전날도 한글 전용에 과연 무슨 부작용이 있나?’라는 원고를 새벽까지 썼다. 이 원고를 기자에게 넘기고 옛 동지 장지영을 만나 정담을 나눈 뒤 집으로 들어서다 쓰러져 323일 새벽에 최현배는 77살의 나이로 생애를 조용히 마감하였다.

 

울산에서는 매년 한글날마다 한글문화예술제라는 축제가 열린다. 외솔기념관과 연계해서 하는 축제라 그 시기에 가장 많은 관람객이 온다. 사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울산만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모두가 기려야 할 인물이다. 바로 한글만 쓰는 세상이 오는데 아주 많은 이바지를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우리말 문법을 짜임새 있게 처음으로 완성했을 뿐 아니라 한글전용 세상을 위해 평생 몸바쳐 싸우고 일했다.

 

최현배는 1910년 나라가 망하고 나서 일본 교장 선생님 밑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이때 일본 교장 말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일본 교장은 오자마자 마치 군인처럼 이제부터는 대일본제국말을 국어라 불러야 한다. 조선말을 국어라 불러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제군들은 이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은 망했지만 우리말글을 다시 조선말, 조선글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리글만큼은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야하겠기에 주시경 선생은 오직 하나의 큰 글이라는 의미로 한글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최현배는 그런 스승의 뜻을 열심히 잇게 된 것이다.

 

우리말 맞춤법, 문법, 한글 역사를 바로 세우다

 

일제 강점기 때 최현배의 최대 업적은 맞춤법과 우리말 문법을 바로 세우고 한글 역사를 저술하신 것이다. 맞춤법은 1933년에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하였는데 우리말글 쓰기의 표준을 정해 우리말과 한글에 담긴 우리의 정신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1938년에 일제는 우리말글을 아예 못쓰고 가르치지도 못하게 했는데 1933년에 맞춤법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맞춤법은 한글 자음과 모음 명칭부터 아주 자세하게 한글 쓰는 법이 나와 있다. 자음 명칭도 조선시대에는 최세진이란 분이 기역부터 이응까지는 기역, 니은처럼 읽고 부터 까지 여섯 자는, ‘, , , , , 라고 정리해 놓았으나 사람들은 , , 로 읽자는 등 다양한 의견으로 갈등이 심했다. 최현배는 , 기역, 니은처럼 지읒, 치읓처럼 읽으면 첫소리와 끝소리에 다 쓰이는 닿소리의 특성을 살린 이름이 되지 않겠냐고 해서 그렇게 정리된 것이다.

 

1937년에 최현배는 <우리말본>이란 책을 펴냈다. 현대 문법의 토대가 된, 무려 12백 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 주시경의 <국어문법(1910)>이 우리말을 세종 이후로 처음으로 과학화한 책이라면, 최현배의 <우리말본(1937)>은 우리말 문법 체계화, 과학화를 완성한 책으로 최현배는 이 책 꼬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우리말본>이 드디어 한 권의 책으로까지 나왔다. 돌아보건대, 내가 조선말의 말본을 배우기 비롯한 지 스물일곱 해만이요, 이 책을 짓기 비롯한 지 열 일곱 해 만이요, 박기를 시작한 지 한 해 반 만이다. 그간에 나의 인간으로서의 행로가 그리 평탄하지 못하였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세상이 어지럽거나 일신이 편치 않거나, 오직 꼿꼿한 한 생각이 다만 이 일을 다 이루지 못할까를 근심할 뿐이었으니, 이에 오늘의 다됨으로써 나의 반생의 의무를 짐부리게 되었으니, 스스로 안심과 기쁨과 감사의 정을 막을 수 없는 바가 있다. -줄임- 나의 평생 골몰한 소원은 이 책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책이 조선말, 조선글의 끝없는 발달에 한 줌의 거름이 되게 함에 있나니, 이는 나의 남은 반생의 할 일이다.” _우리말본 꼬리말

 

이 책에는 명사, 동사, 부사와 같은 어려운 품사 이름 대신에 이름씨, 움직씨, 어찌씨와 같은 쉬운 토박이말로 되어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더니 1938년에는 우리말글 사용과 교육을 아예 금지했다. 1940년에는 아예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법령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강제로 폐간하면서 우리말글 말살 정책을 밀어붙이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인 1940년에 한글 곧 세종대왕이 만들어 반포할 때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상북도 안동에서 기적처럼 발견됐다. 이 책을 잘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의 도움으로 이 책이 세종대왕이 직접 펴낸 책이라는 것을 최현배가 자세히 밝혀 한글 역사서인 <한글갈>에 실어 자랑스런 우리말글 역사와 혼을 되살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글갈> 저술을 끝내고 출판하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한글날>을 서둘러 끝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해례본과 한글에 관한 외솔의 저술을 못 보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해방 후 한글전용의 길을 닦다




 

해방 직후 최현배는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아 교과서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그래서 1947110일까지 <한글첫걸음>, <한글교수지침>, <초등국어교본>을 비롯하여 교과서 12종을 편찬하여 한글만 쓰기의 뿌리를 내리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로 알려진 정겨운 한글전용 교과서를 최현배가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쉬운 말로 자주 쓰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도 최현배 선생이 다듬은 말이다. 원래는 가감승제라는 어려운 말을 썼다. 음악 시간에 배우는 반올림표, 반내림표와 같은 말도 지어내 음악공부도 쉽고 재미있게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런 노력과 더불어 최현배는 제헌국회의원들을 만나 한글전용법제정 운동을 폈고 그리하여 1948109, 한글날을 기념하여, 법률 6호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이 생기는데 많은 애를 썼다. 다만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한글만 쓰기가 온전히 이루어지까지 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1968년 박정희 정권 때 한글전용 5개년 계획(국무회의)이 의결되어 한글전용이 서서히 정착이 되고 결국 1988년 한글전용 신문인 한겨레신문이 국민모금으로 창간되면서 국민의 힘에 의해 한글전용 시대가 열렸다. 바로 최현배와 그를 따르는 동지와 국민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과학적이고 쉬운 한글로 말하듯이 쉽게 써서 누구나 쉽게 소통하게 하는 것은 세종의 꿈이기도 하고 외솔의 꿈이기도 했다. 말과 글로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전 세계 사람들의 꿈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이런 꿈을 잘 이룰 수 한글이 있었기에 잘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초등학생들도 한글만으로 된 교과서와 수많은 책들을 쉽게 읽게 된 것이다.

 

최현배는 <글자의 혁명>이라는 책에서 한글은 우리 배달겨레의 정신문화의 최대의 산물이며, 세계 온 인류의 공탑이다. 이는 우리의 자랑이요 또한 우리의 무기이다. 이를 사랑하며 부리는 데에만 우리의 생명이 뛰놀며, 희망이 솟아나며, 행복이 약속된다.”라고 얘기했다.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이라는 책에서는 말씨는 겨레의 표현일 뿐 아니라, 또 그 생명이요, 힘이다. 말씨가 움직이는 곳에 겨레가 움직이고, 말씨가 흥하는 곳에 겨레가 흥한다. 여기에 겨레 다툼은 말씨 다툼으로 나타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말이란 단순한 의사 전달의 연모가 아니다. 말은 얼을 나타내고, 글은 말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얼과 말과 글은 셋이면서 하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얼말글’, ‘말글얼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