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복개당이 헐린 지 20여년이 지난 1998년, 복개당 자료 14건이 국립민속박물관 유물 공개구매에 의해 이동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산 14건의 유물 가운데 무신(巫神) 그림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관우>, <장비> 등 모두 6점이다. 복개당이 헐리는 과정에서 무신도 이외의 여타 물건들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행방이 모연하다. 무신도를 포함한 일부가 동대문에 있는 관성제군묘(동묘)로 옮겨 갔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무신도 6점만이 복개당 무신도의 전부 인지는 의문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복개당 무신도로 분류된 6점 가운데 정확하게 복개당 것으로 확인된 것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등 4점뿐이다. 이 그림들은 불화를 전문으로 그렸던 월파(月波), 삼여(三如), 행활(幸活) 등의 화승(畵僧)들이 1868년 복개당 중수 시점을 전후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국립민속박물관 보존과학팀에서 그림에 사용된 안료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추정된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복개당 유물목록에 등재되어 있는 위의 4점 이외의 무신도는 관우와 장비인데 이들도 국립민속박물관 유물 공개 구입 시 일괄적으로 산 것이다. 따라서 복개당 무신도로 확인된 위의 4점과 <관우>, <장비> 2점 등 모두 6점이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복개당 유물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점은 이미 밝혀진 4점(<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과는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조성된 것이며, 누가 언제 그렸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림재료로 사용된 면이 종이에 배접되었는데 거친 삼실로 짜서 만든 일본제 마대(麻袋)를 재활용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관우> 그림 오른쪽 하단에 마대를 제작한 방직회사 마크가 “Japan”이라는 영문과 함께 찍혀 있다.
이 그림은 도안으로 보아 대략 일제강점기 때쯤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등 4점의 그림이 화승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은 중수기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무신도 작자가 밝혀진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고, 일반적으로 작자 미상이다.
따라서 <관우>와 <장비>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점의 그림이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과 함께 마포 복개당에 모셔져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그림들이 세조대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마을당에 모셔졌을 가능성은 그 다시 크지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 시피, 관우와 장비는 중국 삼국시대에 크게 활약하였던 무장들이다. 관우(關羽, ?-219)는 유비(劉備)를 섬겨 촉한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운 영웅이며, 장비(張飛, 167-221)도 맹장으로써 촉한 건국의 큰 공신으로 활약하였다. 이들 가운데 특히 관우는 충성심, 의리, 당당한 성품 등으로 말미암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오랫동안 존경받아 왔다. 그래서 관우와 관련된 민담은 물론이고 신앙으로까지 발전되어져 널리 퍼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 관우를 극진히 모시기 위해 관묘까지 세우면서 그를 신앙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관우신앙이 널리 퍼졌다. 그런데 한국에서 관우를 신격화하는 데에는 특징이 있다. 그를 군왕으로써 신격화하여 성제(聖帝)로 모신다는 것이다. 관우의 여려가지 벼슬 중 가장 높은 지위에서 그가 신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적 인물인 관우와 장비가 조선시대 군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복개당과 같은 마을당에 모셔지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연유가 뒤따라 할 것이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서는 그러한 것을 전혀 살필 수가 없다. 당시 복개당 유물 수습에 참여한 윤열수도 복개당에서 이 그림들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하며, 1998년 국립민속박물관에 복개당 유물을 납품한 고미술업자도 이 그림들을 1996년 조자룡으로부터 구입하였는데 고령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의 상황이 잘 기억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무튼, 국립민속박물관의 복개당 유물로 분류되고 있는 <관우>와 <장비> 그림은 주인공이 장군복을 입고 있으면서 커다란 언월도, 삼치장 그리고 깃발을 들고 있는데, 이는 한국에서 봉신되어진 신격이 분명하지만 이들이 어디에서 봉신된 것인지는 조사와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본 글에서는 복개당 무신도로 확인된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등 4점의 그림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일월도>를 뒤 배경으로 당 내부의 가장자리에 봉안되었던 세조대왕(世祖大王, 1417-1468)은 복개당에서 주신으로 모셔졌었다.
세조대왕은 1455년부터 1468년까지 14년간 조선 제7대 왕으로 재위하였는데,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심씨(昭憲王后沈氏)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세종 27년 1445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 세종대왕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였고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단종이 12살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임금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한 군왕이다. 세조대왕의 왕비 정희왕후윤씨(貞熹王后尹氏, 1418-1483)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1428년 당시 진양대군이었던 세조와 혼인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고 덕종(의경세자)과 예종의 모후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시대 최초 대왕대비로 봉해졌다. 한편 그녀는 1455년 계유정난이 일어날 때, 남편인 진양대군이 정난에 나가는 것을 부추겼다고 한다. 또한 단종을 상왕으로 올리는 것, 유배를 보내는 것, 사약을 내리는 것 등에도 관여하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정희왕후는 정치에 직간접으로 간여한 여장부 기질을 가진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가 되었고,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레 병으로 승하하자 당일 바로 한명회와 결탁하여 둘째 손자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린 뒤 자신은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조선 최초의 수렴첨정을 하기도 하였다.
복개당에 봉안된 군왕이 세조대왕이라는 것은 1937년 무라야마지쥰의 자료에서 밝혀진 것이다. 무라야마지쥰의 자료에 복개당 내부 정면에 세조존영(世祖尊影)이 봉안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66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 지명총람(1)-서울편》에 복개당이 세종대왕을 모신당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표기된 듯하다. 무라야마지쥰 책 뒷부분의 부록 편에 실린 사진 자료에서도 복개당 제신이 세조대왕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라야마지쥰은 그의 책을 통해 복개당에 세조대왕이 어떻게 해서 봉안되게 되었는가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