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시가현(滋賀県) 오오츠시(大津市)에 있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신라젠진도, 일본에서 신라는 ‘시라기’로 발음하지만 신라선신당의 경우는 그대로 ‘신라’로 발음한다)을 찾아 간 날은 지난 12일(금) 낮 1시 무렵이었다. 지난해에 견주어 시가현을 비롯한 일본 남부 지방의 날씨가 쌀쌀하여 예전 같으면 벚꽃이 지고 있을 때지만 이날은 꽃이 한창이었다.
신라선신당이 왜 그곳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오오츠에 있는 신라선신당은 1,3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필자는 교토나 오사카 쪽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에는 잠시 짬을 내어 신라선신당을 들르는 버릇이 있다.
신당(神堂)이란 신사(神社, 진자) 또는 신궁(神宮, 진구)과 같은 뜻으로 우리로 말하자면 사당(祠堂)인 셈이다. 우리네 사당이 조상신을 모시고 있는 것과 같이 일본의 신사(神社)도 조상신을 모신다. 신라선신당은 말 그대로 신라의 신(神)을 모시는 곳이다.
그럼 왜, 일본땅 시가현 오오츠(大津)에 신라선신당이 있는 것일까? 궁금해질 것이다. 천년고도 교토에서 특급열차로 10여분이면 도착하는 오오츠는 고대에는 오우미(近江)로 불리던 곳으로 천지왕(天智天皇, 667년) 시절에 수도였으며 오오츠궁(大津宮)이 있었다.
리츠메이칸대학 (立命館大学) 교수를 지낸 이마이 케이치(今井啓一, 1905-1975)) 씨는 《귀화인과 사사(社寺)》에서 “신라선신당은 원성사(園城寺)의 오사진수(5社鎭守)의 하나로 북원(北元)에 속한다. 이 신사의 본존인 국보 신라명신의 신상(神像)은 산형(山形)의 관을 쓰고 갈색 도포를 입었으며 흰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이 분이 일본 개국신인 스사노오미코토(素盞烏尊)이다. 이곳 신라선신당 보전(寶殿)에서 미나모토노요리요시(源賴義)의 아들 요시미츠(義光, 1045-1127)는 원복(元服, 나라시대 이후 남자의 성인식)을 했으며 성을 ‘미나모토(源)’에서 ‘신라사브로(新羅三郞)’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다. 일본의 개국신인 스사노오미코토(素盞烏尊)가 신라신이라는 이야기다. 신라선신당의 본전(本殿)의 문을 열어 놓으면 신라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신라선신당은 언제 찾아가도 한적하고 조용하다. 찾는 이가 거의 없는데다가 언제나 본전(本殿)의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외관만 보아야 하는 점이 안타깝다. 이따금 일본의 고대역사를 공부하는 단체나 개인들이 발걸음을 할뿐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신라선신당 가까이에 있는 원성사(園城寺 ‘온조지’, 다른 이름 三井寺 ‘미이데라’)에만 발걸음을 옮긴다.
이마이 교수의 말을 뒷받침하듯이 《삼정사연기(三井寺縁起)》에 따르면 “신라명신(新羅明神)은 원진(円珍, 엔친, 814-891)스님이 당나라 유학 때 현신한 불법(佛法) 수호신으로 험난한 뱃길에서 무사 귀국한 원진스님은 신라선신당을 짓고 신라명신을 모시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지금의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은 오오츠 시청 서쪽에 있다. 일찍이 북원(北院)에는 신라선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가람과 승방이 있었으나 명치유신 때 정부가 신라선신당과 페노로사묘(1853-1908, 미국인으로 일본의 미술을 서구에 소개함)가 있는 법명원(法明院)만 남기고 모두 헐어 버렸다. 2차 대전 후 미군의 캠프로 쓰다가 현재는 오오츠 시청과 현립 오오츠상업고교와 황자공원이 들어 서있다.”고 밝히고 있다. 명치정부의 불교 탄압 이전에는 신라선신당의 규모가 엄청 컸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라선신당이 자리한 곳에는 천년고찰 삼정사(三井寺, 미이데라)가 자리하고 있다. 삼정사의 원래 이름은 원성사(園城寺, 온조지)로 이 고장은 백제인 오오토모(大友) 씨들의 근거지였다. 오오토모 씨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치노오미(阿知使主)의 후손인 백제계 도래인들로 황실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호족이다. 이들이 정착한 이 일대에 천지왕(天智天皇, 626-672)은 오오츠궁(大津宮)을 세웠고 불심이 깊었던 사람이다.
원성사는 이후 삼정사(三井寺)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름에서 보듯이 우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삼정사 안에 있는 이 우물은 천지왕(天智天皇), 천무왕(天武天皇), 지통왕(持統天皇)이 태어났을 때 산탕(産湯, 갓 태어난 아기 목욕물)으로 쓰였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이곳이 고대 황실과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삼정사를 부흥 시킨 사람이 바로 신라선신당을 지은 지증대사 원진(円珍)스님으로 그의 어머니는 신라계 홍법대사 공해(空海,774-835)의 조카딸이다.
원진스님에 대한 출생관련 이야기는 일본의 최대 설화집인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 12세기》 11권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여기에 보면 그의 어머니는 아침 해의 밝은 광채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원진스님을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원진스님은 8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불경인 《인과경, 因果經》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아버지는 놀라운 마음에 이 경전을 구해주었고 어린 원진은 순식간에 그만 통째로 암기해 버리고 만다. 열 살 때에는 <논어><한서><문선>을 모두 암송해버리는 등 신통력을 발휘하게 되고 이러한 여세를 몰아 14살 때 연력사(延曆寺, 엔랴쿠지)의 의신스님(781-833)에게 맡겨져 불법 공부를 시작한 이래 19살 때 수계를 받고 ‘원진(円珍)’이라는 수계명을 받게 된다.
삼정사는 7세기에 백제인 오오토모씨의 씨사(氏寺)로써 창건되어 9세기에 당 유학을 마친 원진스님에 의해 중흥되었고 근처에 있는 신라선신당 역시 원진스님의 당나라 유학 시절 수호신을 모신 곳이니 오오츠(大津)땅은 이래저래 고대 한국과 관련이 깊은 땅이다.
삼정사를 둘러보고 신라선신당으로 걸어가는 길은 며칠 동안 봄비가 내려 칙칙했던 날씨가 맑게 개여 하늘은 마치 초가을 날씨처럼 푸르렀다. 신라선신당과 삼정사를 제대로 보려면 한나절로는 어렵다. 삼정사 경내에는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대형 팔각윤장(八角輪藏)이 있다. 여기 모셔진 고려대장경은 풍신수길의 5대 참모 중 하나인 모리데루모토(毛利輝元)가 1602년 야마구치현(山口縣) 국청사(國淸寺)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렇듯 삼정사 경내를 두루 돌아보고 신라선신당까지 보려면 적어도 하루는 잡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불교 시설은 명치정부(1868-1912)때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겨우 살아남아 있는 현재의 삼정사를 둘러보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리는데 파괴되지 않았던 1,300여 년 전의 규모란 상상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곳이 고대 백제인들의 터전이었으며 황실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땅이라는 사실을 알면 오오츠(大津) 여행은 좀 더 각별할 것이다.
또한 멀지 않은 비파호가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에는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던 고구려 혜자스님을 기려 지은 서교사(西敎寺, 사이쿄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단풍이 아름답기로 꼽히는 백제사(百濟寺, 햐쿠사이지)도 근방에 자리하고 있는 등 오오츠(大津)는 고대 한국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어 이르는 곳마다 남다른 감회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신라젠진도) 찾아가는 길★
1)京阪電鉄 石山坂本線 三井寺駅에서 걸어서 10여분
2)JR西日本 東海道本線(琵琶湖線)大津駅에서 케이한버스(京阪バス)를 타고 미이데라버스정류장에서(三井寺バス停) 내리면 바로 절이다.
3)JR西日本 湖西線 大津京駅에서 걸어서 10여분 : 필자가 이번에 이용한 교통수단으로 오오츠쿄(大津京駅)에서 내려 걷거나 택시를 타면 800엔(8천원) 정도 나온다. 택시 이용 시에는 삼정사(三井寺, 미이데라)까지 타고 가서 삼정사를 둘러보고 오오스시청 쪽으로 걸어가면 신라선신당이 나온다. 신라선신당에서부터 오오츠쿄역(大津京駅)까지는 가까운 거리라 걷는 것이 좋다.
★참고로 오오츠(大津)에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래 절을 찾아보면 좋다.
*성덕태자의 스승인 고구려 혜자스님을 추모해 지은 절 서교사(西教寺, 사이쿄지)
주소: 滋賀県大津市坂本5丁目13-1
*백제를 향해 지은 천년고찰 백제사(百濟寺, 햐쿠사이지)
주소: 滋賀県東近江市百済寺町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