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눈에 덮힌 히말라야산맥을 바라보면서 걸으니 병산은 기분이 좋았나 보다. 병산은 실크로드 순례 계획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2019년 여름방학 동안에 병산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터키의 앙카라를 지나 이스탄불과 그리스 아테네까지 간다고 한다. 이 지역은 치안이 불안하고 사막이 많아서 걷지 않고 기차로 이동하겠다고 한다. 이스탄불에서는 (동방)정교회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를 친견할 계획이다. 올해 겨울에 아테네부터 시작해서 동유럽 여러 나라를 걷는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대표를 만난 후 스위스에서 알프스를 걸어서 넘어 이탈리아 로마로 내려와 교황을 알현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후에 새로운 국제기구의 창설을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전세계 원전의 방사능을 측정하고 감시하는 새로운 기구의 이름은 영어로 EL이라고 작명까지 해두었단다. EL이 무어냐고 물으니, “Earth and Life”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병산에게 EL의 본부는 어디에 두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당연히 한국에 본부를 두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병산의 대답은 “십자군 전쟁에서는 이슬람교와 천주교가 싸웠다. 유럽의 종교전쟁에서는 신교와 구교가 싸웠다. 최근의 IS 전쟁은 회교도 중에서 시아파와 수니파가 싸웠다. 한국은 유교와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가 공존하면서도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종교를 이유로 싸우지 않으므로 종교적으로 평화로운 나라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드는 EL의 본부는 한국에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생각해 보니 병산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병산을 안 지는 꽤 오래 된다. 나는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한 4대강 사업을 열심히 반대했는데, 그 때부터 우리는 뜻을 같이 하고 행동을 같이 하였다. 그 때에 병산이 한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병산은 국토를 망치는 4대강 사업은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개탄하면서, 정권이 바뀌면 적극적으로 4대강 사업에 찬동한 국토해양부 공무원들을 모두 무인도의 등대지기로 발령 내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발한 처벌 방법이다.
탈핵 운동을 하면서 병산은 다시 한 번 멋진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었다. 병산의 주장에 따르면 원전을 찬성하는 것은 후손에게 핵폐기물이라는 엄청난 유해물이자 폭탄을 떠넘기는 행동이다. 후손의 안녕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원전을 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병산은 핵심적인 원전 찬성론자들의 성씨와 본관을 조사하여 문중에 편지를 보내겠다고 한다. 그 편지에는 이 사람이 후손에게 위험한 유산을 남기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족보에 그 기록을 남겨도 괜찮겠는지 의견을 들어보라고 권고하겠다고 한다. 이 또한 기발한 방법이다.
카페에서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보니 명상센터를 지난다. 간판을 읽어보니 “영원한 행복을 위한 명상센터 (Meditation Center for Eternal Happiness)”라고 쓰여 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재력(돈), 권력, 건강, 사랑 등등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고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로자 씨에게 물었다. 명상의 나라 인도에서는 사람들이 명상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는가? 자연스럽게 대화는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로 이어졌다.
인도에서 16년이나 산 로자 씨가 말했다. “인도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국민소득이 아주 높은 선진국 미국 국민이 볼 때에 인도인들은 가난해서 행복하지 않을 것 같지만 자기가 관찰해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목표인가 결과인가? 목표를 달성해야 행복한가, 아니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네 사람의 의견이 각기 달랐다.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행복의 조건으로서 목표가 꼭 있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 “높은 소득”을 목표로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해야 행복할 수 있는가? 로자 씨의 말에 따르면 인도 사람들은 목표가 없지만 그냥 살면서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단다.
무엇을 꼭 사야한다는 목표가 없다. 인도 사람들은 지위에 대한 욕심도 없단다. 직장에서 승진하려고 안달하지 않고, 승진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가난하지만 얼굴에 짜증이 없다고 한다. 우리식으로 해석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가므로 얼굴이 찌푸려지지 않는 것이다. 인도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많이 다른 것 같다. 인도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어 보면 인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반절의 여행객들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라’가 인도이다. 거지, 더러움, 소란, 속임수, 기차 연착, 음식 냄새 등등을 이유로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반절의 여행객들은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나라’가 인도이다. 겉으로는 가난하고 더럽고 시끄럽지만 인도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묘한 매력이 있어서 꼭 한번 다시 가고 싶다는 것이다. 로자 씨가 긍정적으로 말하는 인도 사람들의 특성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다면 인도는 다시 가고 싶은 나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인도 사람들은 가난해도 목표가 없고, 또 목표가 없는데도 행복하다고 느낄까?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다. 인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관한 질문이다. 내가 볼 때에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과 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급 200만원을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월급을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비교는 끝이 없고, 그의 불만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견주지 않고 월급 200만원에 만족하면서 산다면 그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견주지 않으면 불만이 있을 수 없고, 그저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인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견주지 않을까? 내가 그 자리에서 로자 씨에게 이 질문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람살라 방문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문제 해결의 열쇠는 윤회사상에 있지 않을까? 인도 특유의 카스트 제도는 태어나는 인간을 계급이라는 틀 속에 집어넣는 매우 불합리한 제도이다. 그러나 윤회를 굳게 믿는다면, 그리하여 이번 생에서 하층 계급으로 태어났더라도 다음 생에서 좋은 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가진다면 그는 얼마든지 만족하고 또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인도에서는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는 소를 흔히 본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다람살라에 와서 소를 딱 한 번 보았다. 고삐가 없이 호텔 앞 숲 언저리에 앉아 있는 커다란 소 한 마리를 보았다. 이 소는 행복할까? 적어도 한국의 소보다는 행복할 것 같다. 한국의 소는 우선 어슬렁거리고 다닐 수가 없다. 인도의 소는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어 먹을 수가 있는데, 한국의 소는 좁은 우리에 갇혀 하루 종일 서 있으면서 주인이 주는 사료와 물을 받아먹기만 한다.
틀림없이 한국의 소는 운동 부족일 것이다. 동물(動物)의 동(動)은 움직일 동이다. 소는 동물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본성에 맞다. 그런데 사육당하는 소는 본성에 맞게 살지를 못한다. 그러니 한국의 소는 행복하지 못할 것 같다.
소의 행복이 소의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라면 사람도 본성에 맞게 살 때에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인도의 소는 우리가 볼 때에는 행복해 보이는데, 스스로는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까? 소에게는 행복을 느끼는 주체, 또는 자아의식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