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금성대왕이 한양에 정착한 뒤, 조선왕실은 당 건립을 후원하고 금성신앙을 확장하는 데 개입하였다. 이러한 증거로써, 조선왕실이 고종 탄일을 맞은 7월을 비롯한 정초와 시월에 명산대천을 비롯한 절과 사당 그리고 신당에 내린 발기(發記)에 금성당을 포함한 것이다(최길성, 「한 말의 궁중 무속: 궁중 [발기]를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55-80 1970).
발기(發記)는 나라와 왕실을 위해 산기도, 위축, 고사, 나례 등에 왕실에서 내린 물품 목록과 수량을 열기한 명세서다. 조선왕실이 금성대왕을 주신으로 모신 금성당에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주상전하만세(主上殿下萬歲)> 전패(殿牌)를 봉안한 것도 조선왕실이 금성당을 신앙처로 삼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구파발 금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전패(殿牌)는 현재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구파발 금성당 마지막 시봉자 송은영(宋恩榮, 1925-2017)에 따르면, 그녀의 시할머니 박윤수는 금성당제가 베풀어지면 왕실에서 궁인을 보내 재정적 지원을 하고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도 증언하였다. 이는 마치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호국사찰에서 불심으로 닦은 공덕을 앞세워 국가의 태평성대를 염원하고 만인의 부귀영화를 소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실은 옛 전통을 지키면서 나라 발전과 만인의 평안을 도모하고 옛 위상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송은영의 시할머니가 젊었을 때까지도 금성당제는 물론이고 이말산 궁인의 진혼제를 거행하게 되면 궁궐 나인들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특히 제물비는 궁중에서 내린 시줏돈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어서 특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금성대왕과 금성대군 전에 올리는 제물은 아무나 장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당시 연신내에 거주하고 있었던 퇴궐한 상궁할머니를 특별히 모셔다 준비하곤 하였다. 궁 할머니가 당제나 진혼제에 쓰일 전물을 맡아 하게 되면 금성당 행랑에서 삼일 낮과 밤을 기거하면서 장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매일 아침 이른 새벽 금성당 뒤편에 있었던 우물로 올라가 새벽 물을 길어와 쌀을 담그고 떡을 빚었다.
금성대왕 신앙이 민간화된 후에도 금성당과 금성당제 역할과 기능은 전과 같았다. 금성당제는 옛 법에 따라 유교식 의례와 무교식 큰 굿을 겸하여 국가의 국태민안, 태평성대, 시화연풍(時和年豐,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듦)과 지역민의 무병장수, 부귀영화, 대동단결을 축원한다. 이때, 왕실에서 평생 봉직하다 고인이 된 이말산 궁인을 추모했다고 송은영이 증언하였다. 이는 과거 노들 금성당에서 뱃길을 오가다 희생된 해양 세력과 뱃사람을 추모하였던 것이나, 각심절 금성당에서 초안산에 묻힌 궁인을 추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편, 전통사회에서는 서울굿 문서를 지역에 따라 세본으로 구분하였다. 구파발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던 구파발제(서댄밖제라고 부르기도 함), 각심절부터 왕십리 일대까지 전승되었던 각심절제(왕십리제고 부르기도 함), 마포 노들로부터 시작하여 한강 변 일대에 전승된 노들제(들머리제라 부르기도 함)가 그것이다.
이처럼은 서울굿은 지역색을 유지하여 각각의 만신 굿문서와 악사 음악을 달리하였다. 그러면서 의례 영역 또한 구분하여 각각의 활동 지역의 독점권을 고수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세 지역 중심에 금성당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굿 유명악사 고 김점석과 고 김순봉에 따르면, 금성당에서는 마치 전통사회에서의 신청이나 재인청과 같이, 해당 지역에 소속된 무녀와 전악(악사)을 학습하기도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구파발 금성당에는 집안 대소사가 있는 신도나 지역민들이 찾아 금성대왕께 소원을 빈다. 뉴타운으로 개발되기 약 20여 년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금성당에서는 일 년 내내 세시 신앙행사가 이어졌었다. 정월 홍수맥이로 시작하여 음력 3월 24일 금성님 탄신 맞이, 칠석 맞이 등 사시사철 중요한 행사들이 늘 있었다. 금성당에 기도하면 훌륭한 자손을 점지하고 가족도 평안하며 모든 만사가 잘 된다고 믿었던 신도가 많았다. 그래서 혼인을 앞둔 진관 일대의 처녀와 총각은 혼례식 전 꼭 금성대왕께 인사를 드리곤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대를 이어 금성당 신앙을 지켜 온 후손들은 금성당이 샤머니즘박물관으로 개관한 후에도 금성당제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소원을 빈다. 능곡에 사는 단골은 해마다 음력 4월 23일 금성님 탄신에 육고기 삶은 것과 생수를 떠 와 받치곤 하였는데, 지금도 당제가 열리면 찾고 있다. 2019년 춘계와 추계 당제에도 금성대왕 전에 제물을 받고 소원을 빌었다.
30년 금성당 신도 김기복(여, 1944년생)은 선몽으로 금성대왕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수시로 금성당을 찾아 소원을 빌곤 한다. 또한, 집안에 소원 빌 일이 있으면 시봉자 송은영에게 전물값을 주고 상을 차려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시봉자 송은영은 단골들이 굿을 하게 되면 굿돈을 받고 날을 잡았다. 그리고 굿값에 알맞게 제물을 장만하고 굿할 만신과 악사들을 부른다. 이렇듯 당지기가 당주 역할을 하였다.
만신들은 가까운 영천과 구파발에서 모셔왔는데, 과거 영천과 무악재 그리고 구파발 일대에는 이름 석 자 날렸던 유명 만신과 악사가 꽤 많았다. 금성당 단골이 굿을 할 때 밖에 나가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시봉자 송은영은 금성당 본당에 보관하고 있는 신복과 악기 등을 가지고 간다. 굿을 하는 도중 제금(자바라)을 치고 이것저것을 돕는다. 그리고 굿돈 셈에서 다른 만신들과 다를 바 없이 한몫을 받는다.
구파발 금성당에는 한해 내내 수많은 기자(祈子, 만신)가 수시로 왕래하면서 새남, 신굿, 경사굿, 재수굿, 맞이굿 등을 하였다. 기자가 재가집 굿을 맡아 금성당에서 굿을 하게 되면 당 시봉자는 마지를 올리도록 준비해 주고 기자와 악사 그리고 신도들의 식사를 준비해 준다. 굿에 필요한 제물은 모두 기자들이 준비해 온다. 그리고 굿이 끝나면 굿당비를 내고 간다.
과거에는 금성당을 찾는 사람이 많아 쉴 새가 없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마지를 올리곤 하였다. 그만큼 정성드리 러 오는 사람이 많았고, 큰굿도 자주 있었다. 이렇듯 해방 후까지도 금성당을 찾는 신도가 상당히 많았다. 서울시 도봉구에 사는 지경철(1948년생)은 10살 무렵 미아리에 거주하면서 백부 지영운(살았으면 122살)을 따라 금성당을 출입하였는데, 당시 미아리에서 새벽 4시 출발하여 박석고개를 넘어 금성당에게 도착하면 이미 많은 신도가 와 있었을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구파발 금성당에서는 만신이 새 제자를 내거나 맞이굿을 할 때 물고를 내린다. ‘물고’라는 것은 내림굿이나 맞이굿을 하기 위해 서울의 세 신당 곧 삼위삼당을 돌며 기도를 올려 당신(堂神)으로부터 재가(裁可)를 받는 것인데 그 삼위삼당이 금성당 세 곳이다.
그 후, 제당(諸堂) 곧 여러 당을 돌아 물고를 추가한다. 금성당 물고를 받기 위해서는 세 겹으로 접은 두 개의 물고 종이와 삼색나물, 삼색과, 삼색편, 고기, 신주 그리고 신전을 준비한다. 금성대왕 앞에 물고 종이와 제물 그리고 신전을 올리고 삼배한 후 신주를 올린다. 그리고 기도하여 내림을 받는다. 금성대왕신이 내리면 크게 세 번의 손뼉을 치면서 대왕 공수를 내린다.
이를 시봉자(당지기)가 지켜보고 있다가 신이 금성대왕 신이 내린 것을 확인한 뒤 인(印)을 내린다. 인은 제자가 가져온 물고 종이에 금성대왕을 상징하는 도장을 찍어 주는 것이다. 제자는 내려진 물고 종이를 신당으로 가져가 굿청 왼쪽 위에 걸어둔다. 굿이 시작되면 제당 맞이를 하게 되는데, 이때 두 개의 물고 종이를 양손으로 나눠 쥐고 삼위 삼당 청배를 하고 춤을 추어서 금성대왕 신으로부터 내림을 받고 신을 좌정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