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1. 성황 및 서낭 유래에 대하여
‘성황’을 ‘서낭’이라고도 한다. 한자로 표기하면 ‘城隍’이며, 한글 표기는 ‘서낭’이다. 20세기 초, 성황(서낭)신앙이 조사되고 연구되었을 때부터 두 용어는 같은 의미로 사용됐지만, 현장에서는 후자에 보다 치중되어 불리는 경향이 있다.
터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神)격의 존재로 믿어져 온 성황 또는 서낭에 대한 유래는 외래설과 전래설이 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온 외래설은 다음과 같다. 6세기 무렵, 위진남북조시대에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지방 세력들이 성황(城隍) 신앙을 발달시켰는데, 당송대에 들어서면서 전역으로 퍼졌다. 송대(618-907) 초기에 이르러 지역의 수호신으로서 제사하는 신앙형태가 발달하였고, 이것이 고려왕조(918-1392)에 전해졌다.
지방분권적이었던 고려 초기, 큰 세력을 갖게 된 지방 토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보호해 줄 종교적 제도로 성황 신앙을 선호하면서 제례 주제권을 장악한 후 향촌 사회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면서 호족들은 성황제를 열어 가문과 문벌 지족(支族)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또 한편으로 무격 집단의 기풍제, 기우제의 성황제를 열어 지역주민을 결속시키고 은택을 베풀었다.
고려 시대의 이와 같은 성황신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성황사(城隍祠)는 진(津), 성(城)의 군사적 요새에 세워졌고, 12세기 중반 이후에는 주, 군, 현의 행정치소에 설치하여 지방관리들이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지역수호신으로 향사하면서 무격이 기풍제, 기우제를 거행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려왕실에서는 영험과 음조(陰助)에 따라 성황신에게 존호와 작위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3년(태조 2)에는 전국 주요 성황신에게 차등을 두어 봉작하고, 성리학 지배이념에 따라 성황제를 유교 예제의 적용을 받게 하였다. 태종대에는 성황을 종묘, 사직에 이어 중사로 편제시켜 왕권의 위계질서에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성황제를 국가 제사로써 관리들이 지내는 국행성황제(國行城隍祭)와 향리, 무당, 지역주민 주도의 민간 성황제로 이원화하였다. 이러한 성황제 개최 목적은 지역민들의 무병장수와 부귀영화 그리고 국가의 안녕을 염원하는 것이었다.
중국 외래에 따른 성황(城隍)신앙과는 달리, 전래에 의한 서낭신앙은 이 땅에 한민족 삶이 영위되면서부터 존재해 온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성황이 고려 때 중국으로 유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으로서, 고대사회의 천신, 목신, 수신 등 자연숭배로부터 싹이 튼 토속적인 신앙이 오늘날의 서낭신앙으로 발전케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전래설에 대해 손진태는 서낭당, 곧 돌무더기로 된 제단을 선왕당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 성황당(城隍堂)의 기능과 비슷한 데서 생긴 명칭이라고 하고 이 서낭당 형태를 몽고(몽골)의 오보와 견줘 비슷한 점을 논하면서 부락의 경계를 표시하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손진태, 「조선의 누석단과 몽고의 오보에 취하여」,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1948)
이는 산을 경계로 삼던 원시시대의 제당이었던 것이 점차 평야지대의 수호신으로까지 확대되고 사원 입구까지 만들게 된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최길성, 《민간신앙의 연구》, 1994, 122쪽)
조지훈 또한 그의 <累石檀 神樹(누석단 신수), 堂(당)집신앙 연구의 서낭[城隍] 考(고)>에서 “서낭[城隍]신앙은 우리나라 민간신앙 중에서 그 연원이 가장 오랠 뿐 아니라 가장 광범한 분포를 보이는 대표적인 신앙전승”이라 전제하고, “그 기원은 고대의 하늘(天神) 숭배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최길성, 앞의 책, 127쪽에서 재인용, 조지훈, <累石檀 神樹, 堂집신앙연구: 서낭考>, 《高大文理論集》, 7집, 1963) 그러면서 이러한 자연 숭배적인 한민족 고유의 토속 신앙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려 때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성황신앙(城隍信仰)과 융합하게 되었고, 그것이 점차 오늘날과 같은 신앙형태로 자리매김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있는 서낭당 형태는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특성에 따라 다양하다. 그것들은 나무에 오색 천을 걸어 두는 서낭목형, 돌을 쌓아 올린 누석단형, 전각을 지어놓은 당집형, 바위를 세워둔 입석형, 나무나 돌로 장승을 만들어 세워둔 장승형 등으로 존재한다. 신성시되는 이러한 형태의 서낭당은 주로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조성하여서 오가는 마을민들의 신앙심을 촉발해 왔다. 그리고 이곳은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파손 또한 해서는 안 될 금기도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이다.
2. 성황대제 제차와 내용
성황의례 전통을 지켜 온 평안도의 성황대제 재차와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여 행렬 (성황님 모셔가기)
당 내부에 모셔져 있는 성황신을 신여(神輿)에 태워 악공들을 앞세우고 행렬을 하여 굿청으로 모셔온다. 신여 행렬에는 대무당을 비롯하여 여타 무당들과 악사들, 제관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뒤따른다.
2) 유교식 제례
제관들이 유교식 제례를 올린다.
3) 무교식 당굿
(1) 주당물림 - 굿을 시작하기 전 모든 신에게 굿의 시작을 알린다. 대무당인 신무(神主巫)가 제관의 생기복덕을 신에게 고한다.
(2) 감흥굿 - 앉은 감흥청배라고도 하며 감흥상 앞에 앉아서 청배를 하면서 모든 신을 불러 좌정시킨다. 감흥상은 평안굿에서 대들보 역할을 한다. 굿청 앞 장구잽이가 앉아 있는 쪽 앞으로 감흥상을 쌓는다. 장구잽이와 마주보고 굿을 하게 되는 무당은 감흥상을 사이에 두고 장구잽이와 마주보도록 한다. 한번 쌓아올린 감흥상은 함부로 움직이거나 이동 또는 변경하지 않는다. 감흥상을 건들게 되면 감흥님에 대한 예우가 올바르지 못할 뿐 아니라 신령님 마음 또한 흔들려 굿덕을 보지 못한다고 믿는다.
감흥상에는 두 개의 상을 포개어 이층의 단을 만드는데 상 위에 단골집에서 가져온 쌀을 수북이 쌓아 올린 뒤 술잔을 올리고 지전으로 예단을 마련한 뒤 단골집 가족 구성, 성명과 생년월일을 적은 하얀 한지를 올려놓는다. 이곳 앞에 앉아 부채를 펴들고 방울을 흔들며 청배를 하게 된다. 모든 굿은 감흥상과 둥굴부채(또는 둘레부채)를 중심으로 진설되는 굿상 사의를 동선으로 하여 진행한다. 그리고 평안도굿은 원칙적으로 시작과 끝맺음을 감흥상 앞에서 한다.
(3) 칠성굿 - 흰 장삼을 입고 고깔을 쓴 뒤, 양어깨에 좌청우홍의 가사를 맨다. 그리고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바랑을 찬다. 칠성굿에서는 칠성, 제석, 불사님 등을 모시고 명과 복을 축원한다.
(4) 타살굿 - 성황님에게 바칠 짐승(소 돼지 닭)을 타살(打殺)한다.
(5) 영정굿 - 나라와 지역을 위해 죽은 영정들을 불러들여 원한을 풀고 먹여 보낸다.
(6) 조상굿 - 제관의 조상과 마을 사람들 가운데 마을을 위해 공헌하다 돌아가신 조상들을 불러들여 원한을 풀어준다.
(7) 군웅굿 -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죽은 원한 맺힌 영혼들을 불러들여 놀려 보낸다.
(8) 성황굿 - 성황대제의 가장 중요한 거리이다. 이 거리에서는 남성황님과 여성황님을 모시고 동서남북의 성황문을 연다. 성황굿은 감응상 앞에서 소리조로 비나수를 한 후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삼베와 감응천으로 성황다리를 만들어 신령들을 모시고 들어오면 성황다리 위에 돈을 깐다. 이 굿은 지역의 돌림병을 막고 각 개인의 평안과 무사태평을 기원한다. 그리고 국태민안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비손한다.
(9) 대감굿 - 대감님들을 모시고 마을이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축원한다. 특히 천복대감을 모시고 마을에 거주하는 개개인의 재복을 비손한다.
(10) 작두굿 - 대무당(神主)이 작두신장과 작두장군을 불러들여 작두 위에 올라가 춤을 춘 뒤 공수를 내린다. 작두굿을 함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좋지 못한 모든 액을 누르고 병환을 물리친다.
(11) 사신풀이 - 일종의 뒷전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를 군웅사신 풀이라고도 한다. 곧 모든 잡귀 잡신들을 먹여 놀려 보내는 것이다.
4) 신여 행렬 (성황님 모셔가기)
굿청에 모셔두었던 신위들을 신여(神輿)에 태워 악공들을 앞세우고 행렬을 하여 당으로 모셔간다. 이때의 신여 행렬에도 대무당을 비롯하여 여타 무당들과 악사들, 제관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