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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평창강가에 세운 ‘김삿갓 시비’ 보셨나요?

절개산을 찾아서 3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3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능선을 넘어가니 금방 강가로 내려서고 둘레길은 강변을 따라간다. 아까 이정표에서 본 강변길이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길 왼쪽의 논에는 파종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써레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써레질 자국이 보이도록 살짝 채워진 물 위로 절개산이 몸을 비추고 있다.

 

 

저 논에 써레질 하는 황소 한 마리 있다면 잠시 아스라한 어릴 때 추억에 잠기겠지만, 저 논은 트랙터로 써레질을 하였겠지? 몇 마지기 논밭 뒤로 마을이 보이는데, 저 마을이 매화마을이겠구나. 강변마을은 언제 보아도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강변을 따라 걷는데 시비(詩碑)가 보인다. 바로 이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김삿갓 시비다. 김삿갓(1807~1863)이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으로 가다가 이곳 평창강 경치에 발목을 잡혀 하룻밤 자고 떠났단다. 그때 쓴 ‘강가(江家)’라는 시가 지금 시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船頭魚躍 銀三尺 선두어약 은삼척

門前峰高 玉萬層 문전봉고 옥만층

流水當窓 稚子潔 유수당창 치자결

洛花入室 老妻香 낙화입실 노처향

 

​뱃머리에 물고기 뛰어오르니 은이 석자요

문 앞에 산봉우리 높으니 옥이 만 층이라

창 바로 앞에 물 흐르니 어린아이 늘 깨끗하고

떨어지는 꽃잎이 방으로 날아드니 늙은 아내까지 향기로워진다

 

 

 

김삿갓은 평창강에서 물고기가 도약할 때 튀기며 반짝이는 물방울에서 석자의 은을 보고, 눈앞의 절개산 높은 절벽에서는 만층의 옥을 보았구나. 우리는 그저 ‘좋구나!’ 하며 감탄만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은이 보이고 옥이 보인다. 경치를 묘사한 앞 2연도 좋지만, 나는 뒤 2연에 더 끌린다. 집 앞에 흐르는 물에서 뛰어노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서는 얼마나 깨끗함이 느껴지는가! 그리고 떨어지는 꽃잎이 방안으로 날아드니 늙은 아내에게선 향내가 나고! 캬아~ 나는 ‘老妻香’에서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집에 들어갈 때 꽃다발 하나 아내의 품에 안겨주고 아내에게서 꽃향기를 맡아볼까?

 

조금 더 가니 강 건너편으로 강물에서부터 절벽이 우뚝 솟아있다. 아양정이 앉아있는 적벽보다 족히 세 배 이상 높아 보이는 절벽이다. 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면 아양정의 절벽보다는 여기에 붙여야 하지 않았을까? 하긴 이 높은 절벽 위에 정자를 세우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정자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양반들이 거기까지 오르내리다가는 ‘헥헥!’ 대느라고 풍류를 즐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까 김삿갓 시비를 보면서는 눈앞에 옥만층(玉萬層)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게 바로 옥만층이겠다. 그렇다면 김삿갓 시비도 여기에 세워놓아야, 시를 감상하면서 더 실감이 나지 않을까? 저 옥만층을 바라보며 김삿갓을 다시 생각한다. 김삿갓이 저 적벽을 - 나는 이 절벽을 적벽으로 부르겠다- 보며 시 한 수를 지었다면, 화순 적벽을 보면서도 시 한 수 남기지 않을 리 없겠지.

 

無等山高松下在 무등산고송하재

赤壁江深沙上流 적벽강심사상류

 

무등산이 높다지만 소나무 아래요

적벽강이 깊다지만 모래 위의 흐름이구나

 

김삿갓이 1841년 처음 화순 적벽을 보고 지은 시다. 김삿갓은 화순 적벽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어 1850년에도 화순 적벽을 찾았고, 1857년 다시 화순 적벽을 찾았을 때는 아예 그곳에 주저앉아 6년을 머문다, 그리고 그곳에서 병이 들어 숨을 거둔다. 지금 김삿갓의 무덤은 그가 처음 방랑길을 떠난 영월 하동면에 있다. 아버지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은 아들 익균이 아버지의 시신을 영월집으로 모셔간 것이다.

 

익균은 그전에도 아버지 소식을 듣고는 전국 이곳저곳으로 몇 번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의 방랑벽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왜 그렇게 방랑을 해야만 했었던가? 김삿갓의 할아버지 선천부사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때 역적인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고 처형되었었다. 김삿갓은 과거시험에서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인지도 모르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답안을 썼다가, 이를 알고는 방랑길을 떠난 것이다.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항상 삿갓을 쓰고...

 

아들 익균이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건만, 김삿갓의 가슴을 태우는 심화(心火)는 아들의 눈물겨운 호소로도 끌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영월군은 하동면에 문학관도 세우고 매년 김삿갓 문화제도 열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심지어 하동면 이름도 아예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 나도 오래전 김삿갓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김삿갓 묘소에 참배하던 생각이 난다. 적벽을 보며 김삿갓을 생각하다 보니 내 생각은 다시금 김삿갓 계곡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적벽 아래에는 또 하나의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정원대 시인이 쓴 <강소사(康召史)>라는 시다.

 

임진년 봄날에

독한 짐승 떼들이

동해를 건너 동촌(東村)에서

소사

흙먼지를 불태우고

 

응암굴

매 한 마리

힘찬 날개짓 세상을 일으켰다

 

절의(節義)를 꽃피운

외대(外臺) 월대(越臺)

전설처럼 흐르는 평창강

 

꽃 같은 몸을 날려

옥(玉)처럼 부서져

만고(萬高)의 정절(貞節)을 이루었도다

아! 아름답도다 강소사

타오르는 불꽃이여

 

소사(召史)라면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말이지 않은가? 그런데 꽃 같은 몸을 날려 옥(玉)처럼 부서졌다고 하니, 필시 강소사는 저 절벽에서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뛰어내렸던 여인이리라. 그럼 정원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한 강소사라는 여인은 누구인가? 임진왜란 때 군수 권두문은 노성산성이 함락되기 전 남은 병력과 군민들을 이끌고 저 절벽 위의 천연의 동굴로 피신하였단다. 한 개의 굴에는 군수 일행이 피신하여 관굴이라 부르고, 또 한 굴에는 군민들이 피신하여 민굴이라 하였단다.

 

이렇게 절벽 중간에 은밀히 난 동굴에 들어가 있으니 왜군 모리길성 부대가 아무리 찾으려 하여도 찾지를 못하였다. 그런데 관굴과 민굴 사이에 통신 수단으로 날린 매의 방울 소리에 굴의 소재가 왜군에 탐지되었다. 그렇지만 워낙 험준한 곳에 있는 동굴이라 공격이 쉽지 않을 터. 그러나 강 건너편에서 마구 총을 쏴대고, 줄을 타고 동굴로 내려오는 왜군들에 의해 끝내 동굴은 함락되었고, 권 군수 이하 여러 관원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때 권 군수의 애첩 강소사는 왜군들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꽃 같은 몸을 날려 옥처럼 부서진 것이다. 아! 아름답도다. 강소사! 타오르는 불꽃이여! 나도 정시인을 따라 애잔한 감탄사를 날리게 된다. 강소사가 이렇게 몸을 날린 뒤 적벽을 품고 있는 산도 아예 이름을 절개산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우리도 절개 둘레길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고...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킨 여인이 비단 저 강소사만 있었겠는가? 많은 여인이 절개를 지키려고 자결을 하고, 또 몸이 더럽혀졌다고 눈물을 흘리며 자결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뿐인가? 병자호란 때 청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수많은 여인이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빠져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남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애꿎은 수많은 여인들이 희생된 안타까움...

 

‘강소사’라고 하니, 그렇게 죽은 많은 여인 가운데 한소사와 이소사가 생각난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치열했던 동래성 전투에서 한소사는 동래부사 송상현을 따라 순절하였다. 그리고 이소사는 포로로 잡혀갔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정조를 지켰고, 그러다가 조선의 포로들이 생환될 때 같이 생환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고 하지. 그리하여 지금 청주에 있는 송상현의 묘소 앞 좌우로 한소사와 이소사도 무덤(이소사의 무덤은 빈뫼-虛墓)을 같이 하고 있고...

 

시에 나오는 외대와 월대는 양쪽으로 솟아오른 절벽을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응암굴은 관굴과 민굴을 함께 부르는 것으로, 바위의 모양이 매의 모양이라 응암굴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설은 원래 매화굴이라고 부르다가 응암굴로 바뀌었다고 한다. 위에서 관굴과 민굴 사이에 매로 통신을 하였다지 않은가? ‘매가 날 때 발목에 달린 방울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왜군에게 들켰다.’ 곧 ‘매 때문에 화(禍)를 불러들였다.’라고 하여 매화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곳 마을 이름도 매화굴에서 따와 매화마을이 되었고...

 

어쩐지 매화도 보이지 않는데 왜 마을 이름이 매화마을일까 의아해하였는데, 꽃 매화가 아니었구나. 그런데 매가 화를 불러들였다는 것을 마을 이름으로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이참에 마을에 매화를 잔뜩 심어 매화(梅花) 마을로 변신하는 것이 어떨까?^^ 그런데 매화굴의 유래를 알고 나니,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다. 연락을 위해 매를 띄우기 전에 방울을 떼어야 했지 않나? 방울 소리에 자기들 은신처가 발각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