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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영혼 쉼터를 찾는 나그네의 노래 곽성삼 <귀향>

김정호 이후에 절제된 한(恨)을 가장 잘 표현한 가수 곽성삼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1]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땐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늘 벙거지를 눌러쓰고 다녔고, 옷이며 신발이며 온몸에 때 국물이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어눌한 말재주에 동문서답을 해대기 일쑤이니 같이 얘기하려면 웬만큼의 참을성은 바탕에 깔아야 했다. 그는 경기도 어디쯤 가서 파지를 주우며 산다고 했다.

 

내게 올적엔 어떤 때는 한참을 걸었는지 옷을 털면 금방이라도 먼지가 풀썩일 것 같았다. 그런 그였지만 밥걱정은 안 한다고 했다. 막걸리가 주식이니 밥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주독이 쌓여 그런지 거무튀튀한 얼굴에 군데군데 쌀알 같은 게 돋아 있기도 했다. 머릿속에 환등기가 켜졌다. 흑백사진이 여러 장 지나갔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철옹성인 줄 알았던 18년 절대권력이 무너졌다. 아직은 곳곳에 왕조숭배사상이 남아 있던 터여서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줄 알고 벌벌 떠는 사람도 많았다. 당장이라도 김일성이가 쳐내려올 것 같고 수출길이 막혀 공장이 멈추고 다 굶어 죽을 것 같은데도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3김 시대”가 오는 듯했으나 어느 귀신이 채 갔는지 “3김”의 3자조차 증발해 버리고 영문 모를 총성이 서울 밤하늘을 가르는 가운데 70년대가 가고 새 10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유비통신”, “카더라 방송”, “땡전 뉴스”가 혼불처럼 춤추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 험한 산 고개 넘어...>

나도 몰래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저 노래처럼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공포와 분노와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나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이젠 마음의 고향에서 편히 쉬고 싶었으리라. 온종일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코끝이 새카매져 들른 어느 자그마한 공연장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그는 모든 게 작았다. 키도 얼굴도 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작았으나 들려오는 영혼의 울림은 누구보다 큰 가수였다.

 

환등기가 꺼지고 현실이 켜졌다. 이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그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는지 서리가 내렸는지 애가 시려 왔다. 비록 인기 가수는 아니었지만 좋은 작품도 많이 남기고 실력을 인정받는 그가 아니었던가?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상징”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그의 음반은 애호가들의 표적이 되어 “부르는 게 값”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어찌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날이 새자 내 전화기는 부쩍 바빠졌다. 며칠 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을 모아 “작은 음악회”를 열어주었다. 감회에 젖어 노래를 듣다 보니 하나둘 그가 이해되어갔다. 그에게 음악은 구도의 매개(媒介)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좋은 옷이 무슨 소용 있으랴. 편안한 잠자리와 기름진 음식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눈빛을 보라! 세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가는 저 눈빛을.

 

 

      

            귀  향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

       험한 산 고개 넘어

       끝없는 나그네길

       이제 쉴 곳 찾으리라

 

       서산에 해 뉘엿뉘엿

       갈 길을 재촉하네

       저 눈물의 언덕 넘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

 

       지나온 오솔길에

       갈꽃이 한창인데

       갈꽃 잎 사이마다

       님의 얼굴 맺혀있네

 

       길 잃은 철새처럼 방황의 길목에서

       뒤쳐진 내 영혼 저 하늘 친구 삼네

       사랑하는 사람들아 나 초저녁 별이 되리

       내 영혼 쉴 때까지 나 소원 노래하리

 

 

음악을 오래 듣다 보면 마지막 다다르는 곳이 대개 세 부류로 나뉘게 된다. 지성적 성향의 사람들은 “클래식”을 선호하는 편이고 화성학을 공부했거나 악기를 좀 다룰 줄 아는 이들은 “재즈” 쪽으로 기운다. 필자처럼 뇌 구조가 복잡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포크”와 “컨트리”를 선호하게 되는데,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포크ㆍ컨트리”를 좋아한다. 우선 사용되는 악기들의 소리가 다 자연에 가깝다는 것이다. 몇 가지 쓰이지도 않지만 대부분 나무통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다.

 

그다음의 이유가 곡의 구조나 내용이 목가적이라는 데 있다. 물론 도회지를 소재로 한 곡이 있기는 하나 시골과 자연을 그린 곡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하더라도 꾸밈없는 창법이 가장 큰 매력요소일 것이다. “포크ㆍ컨트리” 가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순수를 지향한다. 그런 필자의 음악적 성향 탓에 목가풍과 토속성까지 더해진 곽성삼의 노래는 매료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그의 한 맺힌 목소리와 음악성은 어린 시절에 이미 결정지어졌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뒤이은 어머니의 죽음, 머잖아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지는 감당키 어려운 충격. 본디부터 의기소침했던 그는 더욱 말이 없어지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기둥이 바로 음악이었다.

 

독학으로 기타를 익힌 곽성삼은 노래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 에 승선한다. 음악다방 디제이인 구자룡과 자형 형제가 건조하고 강인원, 전인권, 남궁옥분, 명혜원, 한돌, 이종만…. 쟁쟁한 승무원들을 배출해낸 동아리였다.

 

번안곡이 “포크”계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우리 가락과 정서를 담은 순수 창작곡만을 고집했던 그들은 가요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업적을 이루게 된다. 70년대 후반 “성현”이란 예명으로 음반을 내기도 했던 그는 유한그루를 통해 <물레>를 히트시킨 것을 시작으로 내로라하는 가수들에게 작품을 제공하기도 했다.

 

김정호 이후에 절제된 한(恨)을 가장 잘 표현한 가수 곽성삼.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어느덧 이십 년이 다돼간다.

지금은 고향을 찾아 긴 여정의 깃을 들이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