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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구대탁굿과 나랏만신 김기백

[양종승의 북한굿 이야기 11]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만구대탁굿은 족보 있는 무당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그 중심에는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여 7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옹진읍 개울몰[堂峴里]로 들어와 살았던 김기백(남, 1893-1944) 나랏무당이 있다. 월남한 실향민들에게 전설적 무당으로 알려진 김기백은 1981년 한국일보가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위대한 한국인 연재에서 조선 무당으로 소개돼 그의 생애 일부가 세간에 알려지기도 하였다.(최성자, 「한국서민열전(國庶民列傳):격동의 근대를 살다간 위대한 한국인들-조선 무당 김기백(28)」, 한국일보 , 1981년 8월 2일)

 

곱상한 외모와 가는 몸매의 체형을 가진 김기백은 겉으론 보기엔 왜소하기 그지 없었지만 내적으로는 강한 의기와 투철한 애국심을 가졌던 조선 무당이었다. 옹진으로 이주한 어린 시절의 김기백은 아버지와 함께 만석꾼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14살 되던 해, 소 풀을 먹이러 나갔다가 바위에 걸려 뒤로 넘어져 기절하였다 깨어난 뒤부터 유식하고 영험한 소리를 하게 되었다. 주위에서 신이 내린 것 같다고 하였지만 김기백의 아버지는 남의 집 종살이를 할망정 광산 김씨 집안 망신은 안 된다며 아들의 신내림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자신보다 쉰 살이나 많은 옹진 일대에서 이름난 강박수(남, 1843-1910)로부터 내림굿을 받고 무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우옥주 증언, 1980년) 김기백은 강박수 문하에서 굿을 배운 뒤, 신아버지가 한일합방 되던 해 사망하자 스승의 귀물(鬼物)을 물려받고 영검이 더 해졌다. 김기백은 덕대(금을 찾는 사람)들에게 금맥을 알려주는 점으로 영검하다는 소문이 옹진군 일대에 퍼지면서 유명 박수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5살 때 마을 어귀 개울가의 서포집(종들이 기거하는 집)을 주인으로부터 물려받고 19살에 여종과 결혼, 무당의 길을 이어갔다. 20살 때 첫아들을 홍역으로 잃고 21살 때 둘째 아들마저 잃은 그는 신벌이라며 다시는 금맥점을 치지 않았다. 30대에 이르려는 신아버지로부터 배운 만구대탁굿과 대동굿을 잘하는 큰만신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두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죽은 넋을 위로하는 진오기굿에 보다 전념하게 되었다. 당시 광산에서는 갱내 안전시설이 엉망이라 광부 죽음이 잦았고 바다에 나가 죽는 어부들도 많아 김기백의 무당 생활은 그렇게 넋굿으로 이어져 갔다.

 

애국심이 투철했던 김기백은 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굿을 할 때면 일본인을 비난하는 공수를 내리곤 하였다. 그러한 성향이 있는 김기백은 1940년 2월 창씨개명 바람이 분 뒤에도 신벌을 받는다며 일본 이름 갖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생을 다할 때까지 조선 무당 김기백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래서 그가 행하는 굿에는 항시 순사가 배치되어 특별감시가 이루어졌다.

 

그래도 김기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굿을 하면서 공수를 내려 일본인 욕을 수시로 하여 순사에게 잡혀가는 일이 많았다. 두들겨 맞고 장구 징 등 신구와 신복을 빼앗기곤 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김기백은 일본과 일본인을 비난하는 공수를 중단하지 않았다. 고향 사람들은 그러한 김기백을 ‘황치 무당’이라고 불렀다. 황치란 ‘순하고 미련스럽게 착하지만 한번 먹은 마음은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는 황해도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인들은 그를 데려다 감금하고 때리기는 했어도 감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은 일제를 비난하자 고리야마 지서장이 그를 잡아다가 심하게 때린 뒤 무복을 찢고 장구, 징, 신칼 등 굿 도구를 빼앗았다. 그 뒤, 고리야마 지서장이 시름시름 알기 시작하자, 그의 부인이 김기백에게 우환굿을 해달라고 애걸을 해서 굿을 하였는데 병이 나았다는 일화가 있다. 고리야마 지서장의 이야기가 옹진군 일대에 전설처럼 퍼져있었던 덕도 있지만, 금광에서 한국인 광부가 죽었을 경우 그에게 굿을 해주어야 사고가 적게 난다고 굳게 믿어 광산굿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기백은 늘 불쌍한 서민을 위해 점을 치고 굿을 하였다. 가난한 환자를 위해서는 조금의 곡식만 받고도 수삼 일씩 굿을 해주었다. 1938년 김기백은 당시 노란병이라 불리던 폐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1942년 50살을 맞아 만구대탁굿을 열었다. 이때도 작두 위에 올라 일본을 비난하는 공수를 내렸다. 폐병에 시달리던 그가 마지막 굿을 한 것은 1943년 8월 어느 사람이 신이 짚혔지만 불리지 못할 지경이어서 눌림굿을 할 때였다.

 

작두에 올라선 김기백은 피맺힌 절규로 공수를 내렸다. “어화 따뜻한 부모 정도 넘 같이 받지 못하고, 어화 글월 한번 넘과 같이 받지 못하고, 어화 팔자 기박해서 귀신 밥이 되어 만신이란 말이 웬 말이냐. 이내 한평생 점치고 굿하며 적선한 것이 전부인데 남은 것은 왜놈의 멍 자국이냐. 거품처럼 일어나 허망하게 스러지는 한평생, 저주가 내려질 바에는 모든 귀신은 이내 몸에만 들게 하라.”는 공수를 내렸다. 그리고 경찰서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

 

김기백은 일자무식이어서 글을 몰랐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총명하고 영리하여 스승으로부터 듣고 보고 배운 굿 문서에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김기백은 만구대탁굿으로 이름 석 자를 날려 옹진 일대는 물론이고 해주까지도 그의 명성이 자자했다.(우옥주 및 박동신 증언, 1980년) 그래서 주위 큰무당들이 자신들의 만구대탁굿에는 꼭 김기백을 불렀다.

 

문하에도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들 중, 만구대탁굿을 전수하였던 남자 제자로는 이재만(1905-1944, 남)과 한연수(1917-1944, 남)가 있었다. 이들도 신아버지와 함께 일본 순사에게 사상범으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 뒤 스승이 사망한 같은 해 감옥에서 죽었다.

 

 

김기백 신딸 가운데 만구대탁굿을 전수받고 살아남은 제자는 우옥주(1920-1993, 여)가 유일하였다. 우옥주는 1920년에 출생하였지만 호적에는 1925년으로 등재되었다. 그는 스승 김기백 박수의 산구애비를 떠온 제자(스승이 살아있을 때 스승의 귀신업을 가져온 제자)로서 고향에서부터 굿 잘하기로 이름난 큰 만신으로 알려졌다. 한국동란 때 남하한 우옥주는 자신의 신당에 신아버지 김기백 성수를 모셔놓고 만구대탁굿을 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