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항일독립운동

만주 통합의 화신, 만주벌 호랑이 일송 김동삼

유교문화에서 꽃피운 경북인의 독립운동-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 한국국학진흥원’ 독립운동 공동 홍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11년,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안동지역 출신 인물들 가운데는 단연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선생을 빠트릴 수 없다. 그는 1878년 경북 안동 임하면 소재의 내앞마을[천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 호는 일송이며, 본명은 긍식(肯植), 이명으로 종식(宗植)을 쓰기도 했다.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입향조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후예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약 600여 년 동안 무수한 명망 있는 학자ㆍ관료를 배출한 안동지역 명문이자 유교문화의 산실로 평가된다. 또한, 이곳은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도 우뚝한 경북 안동인의 독립운동 흔적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마을이기도 하다.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한말, 이들은 의병항쟁에 뛰어들기도 하고, 특히 보수적인 기조가 강한 이 지역에서 신식학문을 받아들이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던 이른바 “혁신유림”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안동지역 첫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가 1907년 이곳에 설립된 바탕에는 초대교장을 역임한 대종가 종손 김병식(金秉植), 자신의 거처를 교실로 희사한 김대락(金大洛), 협동학교의 설립 주체로서 혁신유림으로 평가되는 김후병(金厚秉), 김형식(金衡植), 김동삼 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동삼 선생은 협동학교의 설립 주체이자 교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구국운동을 펼쳤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과감히 가산을 처분하고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 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1911년 3월 30일 안동 협동학교 1회 졸업식 사진에 등장하고, 같은 해 4월 무렵 유하현 삼원포에서 결성된 경학사의 조직ㆍ선전을 담당하였다는 이력을 통해 4월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http://www.ugyo.net/) 누리집에서 검색 가능한 류장식(柳璋植)의 시문집 《가림선생문집(可林先生文集)》에는 1912년 3월부터 4월까지 약 1달 동안 서울을 왕래하며 보고들은 사실을 기록한 「서행일록(西行日錄)」이라는 일기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류장식은 4월 5일 서울에 도착하여 정현모(鄭顯模)와 김긍식(金肯植)을 만났고, 다음날 6일 김긍식이 서간도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김동삼은 적어도 1912년 4월 무렵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만주 망명 이후 잠시 귀국한 상황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한 경위는 다른 자료를 통해 연구되어야 한다.

 

 

 

만주 망명 이후 그는 경학사에 참여하고, 백서농장ㆍ부민단 등을 설립하여 동포사회의 안정과 독립군 양성의 토대를 구축해갔다. 또한, 1919년 2월 대한독립의군부에서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에 39명의 대표자 안에 들어가는 등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으뜸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특히 1923년 국민대표회의의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그는 1931년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7년 순국하였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며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 서대문형무소 옥중 유언 가운데 -

 

나라와 겨레를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동삼 선생의 행적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들은 판결문, 수형카드, 신문자료 등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가 직접 남긴 친필 자료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들은 현재 진흥원에서 소장한 편지 2점 정도이며, 그 안에서도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기탁자료인 위장(조문편지) 1점을 제외하면 ‘광산김씨 예안파 후조당종택’ 기탁자료인 <1909년 협동학교 김긍식이 외내[烏川]의 김정장(金正章), 김기동(金基東)에게 보낸 편지> 1점이 남아있다. 그밖에 진흥원 소장 유물 가운데 ‘의성김씨 천전파 대종택’ 기탁자료인 대기병(병풍)에 김동삼 선생의 친필본으로 추정되는 편지 1점이 배접되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 편지는 발급연도는 기재되지 않은 채 9월 4일이라고 되어 있고, 자신의 이름을 적는 부분에는 다만 “삼종(三從)”이라고 기록하였다. 수급인은 김세림(金世林), 김병대(金秉大) 2인이다. “삼종”은 보통 8촌 형제를 이르는 용어로도 사용되지만, 이 편지의 본문에 자신을 ‘족종(族從)’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마지막 이름을 적은 부분과 다르고, 필체도 김동삼의 다른 편지와 비슷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면, ‘삼’은 ‘동삼’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 편지는 그의 만주 망명 이후인 1913년 무렵 자신의 이름을 ‘긍식’에서 ‘동삼’으로 바꾸고 난 뒤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관해 관련 학계의 연구가 주목된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독립운동가 인물총서 시리즈의 첫 번째 도서로 2009년에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을 펴내 그간 수집된 자료와 연구를 종합하였다. 이후에도 그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ㆍ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특히 수집된 자료들 가운데는 김동삼 선생의 가족사진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사진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김동삼 선생에게 가족들마저 면회가 힘든 상황에서 그에게 보내기 위해 찍은 사진이다. 여기에는 아내 박순부 여사를 비롯해 큰아들 정묵, 둘째아들 용묵, 큰손자 장생, 큰며느리 이해동 등 가족 10인이 등장한다. 만주벌에서 호랑이 같은 용맹을 떨치며 독립운동을 펼친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 가족들, 고난의 삶과 비장함이 느껴진다.

 

 

내년 2021년은 만주망명 110주년으로 이를 미리 알리고 기념하고자, 한국국학진흥원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이러한 자료들을 활용하여 ‘유교문화에서 꽃피운 경북인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의 다섯 번째 공동홍보물 “만주 통합의 화신, 만주벌 호랑이 일송 김동삼”을 기획하였다. 이는 카드뉴스 형태의 홍보물로 제작되어 블로그ㆍSNS 등 두 기관의 공식 온라인 홍보채널에 소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