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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수집가 하정웅, 그가 내딛는 구도의 발걸음

하정웅 수집의 네 가지 특징 ‘기록’과 ‘기도’, ‘확장’과 ‘기쁨의 공유’
[서평] 《날마다 한 걸음》, 하정웅ㆍ권현정, 메디치미디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명력력 노당당(明歷歷 露堂堂).

무슨 일이든 밝게 당당하게 드러나는 경지. 좋은 일을 하면 응당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수집가 하정웅이 아끼는 이 구절은 그가 걸어온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세상과 나눈 수집은 하나의 선한 씨앗이 되어 수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꽃을 피웠다.

 

하정웅은 흔히, ‘미술 작품 1만 점을 기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50년 동안 수집한 1만여 점의 작품들을 한국의 공립미술관에 기꺼이 기증했다. 1993년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당시 212점을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포항시립미술관, 영암군립하미술관 등 전국의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했고, 어느덧 그 수가 1만 점을 훌쩍 넘었다. 기증 작품의 면면도 화려해 액수로 따지면 수천억 원에 달할 정도다.

 

수십 년 세월, 한 점 한 점 열과 성을 다해 모은 작품을 떠나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개인 미술관을 세워 작품을 전시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렇듯 자신의 뿌리가 되는 고국의 공립미술관에 작품을 기부한 사례는 흔치 않다. 여기에는 한국에도 속하지 못하고, 일본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며 살았던 세월에 대한 통한과 고뇌가 담겨 있다.

 

권현정 작가가 메디치미디어를 통해서 펴낸 《날마다 한 걸음》은 이런 하정웅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책이다. 그의 탄생부터 성공한 기업가로 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는 오늘날까지, 인생 역정과 더불어 미술품 수집의 철학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하정웅은 1939년, 오사카에서 가난한 재일한국인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열여섯 살 때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오사카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열여덟 살 때 아버지와 혼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두 사람은 첫아들인 하정웅을 낳은 후, 동북 지방의 아키타에 일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아키타로 이주했다. 추운 지방인 아키타에서, 일 년의 절반을 살을 에는 추위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온종일 고된 노동에 매달렸지만 세 식구를 건사하기에도 수입은 턱없이 부족했다.

 

해방 뒤 귀국하려 했지만, 귀국선 표를 구하지 못해 결국 일본에 정착하게 된 하정웅 일가는 아키타에서 마부 일을 하며 힘겹게 생계를 꾸렸다. 하정웅 역시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소학교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하며 생계전선에 뛰어들었고, 가족 모두가 쉴 새 없이 일했지만, 가난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하정웅은 타고난 명민함과 좋은 인성으로 주목받는 학생이었고, 선생님들도 그를 차별 없이 대하며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었다. 하정웅이 인생 최고의 행운 중 하나로 소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었다는 점을 꼽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진학도 가정형편 때문에 포기하려 했으나, 하정웅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나카지마 선생이 눈물로 호소한 끝에 아키타 최고의 명문이었던 아키타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가 위험한 쌀 암거래를 하며 학비를 댔다.

 

사실, 장남으로 집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무거웠지만, 하정웅은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고등학교 시절, 등하교에 왕복 여덟 시간이 걸리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다녔던 아키타공업고등학교에는 미술부가 없었다. 하정웅은 처음으로 미술부를 만들고 작품을 꾸준히 그렸고, 여러 미술 대회를 휩쓸 만큼 재능도 출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환쟁이’가 되면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할 것이라는 생각에 펄펄 뛰며 반대했다. 어느 날은 급기야 하정웅이 아끼는 붓과 물감을 모두 강에 던져 버렸다. 화가가 되겠다는 하정웅의 꿈도 이때 함께 떠내려갔다. 가난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속수무책이었다.

 

마침내 고등학교 졸업 시기가 되자, 그는 취업률 100%를 자랑하는 명문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만큼 취업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자신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재일한국인, 곧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단 한 곳도 취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좋은 선생님들의 보호 속에서 차별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그는 충격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십 대 중반 결혼을 하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암흑기였다. 취업 실패에 충격을 받고 도쿄로 간 그는 한 회사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며 실명 위기까지 올 만큼 혹독한 고생을 했다. 당시 현실이 너무나 힘들어 북송선을 탈까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자 마침내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시작은 엉뚱했다. 신혼살림을 꾸리기 위해 가전제품을 산 곳에서 하정웅의 명의를 도용해 사기를 친 것이다. 결국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엄청난 빚과 가전제품 대리점 운영을 떠맡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게 운영을 시작하자마자 도쿄올림픽 특수를 타고 가전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3달 만에 빚을 다 갚을 정도로 대박이 났다. 어느새 하정웅은 모두가 알아주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첫 그림을 산 것도 이즈음이었다. 화가의 꿈을 아깝게 포기한 그는 다른 작가의 그림을 보는 것에서 위안을 찾으려 화랑에 자주 갔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의 한 작품을 만난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오래도록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미륵보살>, 전화황 작품. 한없이 온화한, 그러면서 한없이 아름다운 자태의 미륵보살이 기도 중이었다. 마치 미륵보살이 나를 위해 기도하는 듯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미륵보살이 나를 비롯해 온갖 상처로 몸부림치는 약자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p.23)

 

보는 순간 전율을 느낀 <미륵보살>은 그의 첫 수집품이 되었고, 전화황은 그가 처음으로 후원한 화가가 되었다. 전화황의 작품세계와 인품에 감동한 그는 이를 계기로 ‘기도’의 철학을 갖게 되었다. 작품을 통해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약한 사람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휴머니스트가 된 것이다.

 

이후 재일한국인 화가 전반에 관심을 가지며 본격적인 수집을 시작했다. 송영옥, 조양규, 문승근, 곽인식, 곽덕준, 이우환, 오일, 손아유 등, 일본 화단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한국 화단과도 단절된 채,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를 떠도는 디아스포라 화가의 한계에 갇혀 있던 이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특히, 이우환은 그의 철학과 사상에 매료되어 유명하지 않던 1970년대부터 집중적으로 관계를 쌓고 작품을 모았다. 지금 이우환은 단색화의 거장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으니 가히 그 안목을 짐작할 만하다.

 

 

 

하정웅은 자신의 수집 특징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많은 작품을 수집했지만, 결코 무분별한 수집이 아니었고, 전시회에서 대충 훑어보고 난 다음 명작이라는 풍문만 듣고, 또는 고가라는 이유로 덜컥 산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 네 가지 특징은 바로 ‘기록’과 ‘기도’, ‘확장’과 ‘기쁨의 공유’다. 첫째, 그의 수집은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가 있다. 재일한국인의 정서와 삶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두 번째, ‘기도’는 그가 모은 그림들이 사회적ㆍ정치적으로 불우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작품이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이들의 기도를 모은다는 심정으로 작품을 수집했다.

 

셋째, ‘확장’은 처음 재일한국인 화가들의 작품을 모으기 시작해 한국 작가의 작품들, 일본 작가들, 그리고 전 세계의 작품들로 확장해 나간 역사를 뜻한다. 마지막 ‘기쁨의 공유’는 예술작품이 주는 기쁨을 많은 사람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극심한 가난으로 어릴 때부터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간직한 그였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좌절하면서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섰고 마침내 큰 기쁨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수집한 작품들을 보노라면, 그림 한 점 한 점이 바로 기도의 발자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정웅은 마치 구도자와도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우리는 쉽게 기도하는 마음을 잊어버린다. 저마다의 삶에 몰두한 나머지 타인의 아픔에는 점차 무신경해진다. 그러나 하정웅은 달랐다. 소외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기도하고, 기록했다. 날마다 그랬다.

 

날마다 일보전진.

하루에 한 가지만이라도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산다면, 그렇게 1년 365일을 지낸다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또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중략)

나를 몽상가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나는 사람들이 날마다 일보전진하는 꿈을 꾼다.

매일 한 가지씩 좋아지는 세상을 상상한다.

나 또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날마다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인생은 훗날 ‘일보전진’이라는 말로 요약되었으면 한다.

그랬으면 참 좋겠다.

(p.142)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그는 자신이 이토록 많이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될 줄 알았을까. 좋은 뜻을 품고, 날마다 한 걸음씩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하늘은 많은 것을 허락한다. 잘 알려진 속담처럼,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도 돕는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을 도울 때, 하늘은 더 크게 돕는다. 하정웅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한 걸음》, 하정웅ㆍ권현정, 메디치미디어, 값 14,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