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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윤여정의 유머가 세계를 넘다

더듬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고도의 수사법을 담은 수상소감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92]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윤여정씨가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이 단연 화제다. 도하 신문들이 인용하는 그 소감은 이랬다.

 

신문 ㄱ “모든 상이 의미있지만, 이 상은 고상한 체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습니다. 매우 행복하네요.”

 

신문 ㄴ “이번 시상식이 특별히 고마운 이유는 고상한 체하는 영국 사람들이 나를 좋은 배우로 알아봐 줬기 때문입니다”

 

방송 ㄷ "모든 상이 의미가 있죠. 하지만 이번 상은 영국인들, 그러니까 고상한 척하는 걸로 유명한 당신들로부터 받은 상이어서 의미가 크네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이 상을 '고상한 체(척)'하는 영국인들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는 소감인 것이다. 그런데 맨 처음 수상소감을 전한 어느 언론은 '고상한 영국인들로부터'라고 해서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이 아니라 고상한 영국인이라고 한 것 같은데 나중에는 다들 '고상한 체하는‘으로 바뀌어 전하고 있다. 우리 언론만을 보고 도대체 '고상한 체'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고 윤여정씨의 영어소감을 확인해보니 이렇게 이야기했다.​

 

"Thank you so much for this award. Every award is meaningful, but this one, especially being recognized by British people, known as very snobbish people, and they approve of me as a good actress, so I'm very privileged and happy. Thank you so much to the voters who voted for me and thank you very much, BAFTA."​

 

영어를 그대로 해석해 보자면

 

"이런 상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상은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이 상은, 특별히 아주 snobbish한 사람들로 알려진 영국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저를 좋은 여배우로 동의했다는 것이 의미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privileged되고 행복합니다. 저에게 투표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그리고 영국아카데미영화상도 아주 고맙습니다."

 

 

 

소감을 다시 보니 언론사 번역 가운데 ㄴ의 번역은 '고상한 척하는 영국인'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해 원뜻과 다르고 ㄱ은 '고상한 체하는 것으로 알려진'이란 번역이어서 적어도 원문의 의미는 살리고 있다고 하겠다. ㄷ은 비슷하기는 한데 '알려진'이란 말을 '유명한'이란 말로 조금 다르게 번역했다.

 

그런데 고상하다는 것으로 풀이를 했지만 ’snobbish people‘이란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뒷부분에 나오는 ’privileged‘라는 단어는 '영광스럽다'는 뜻으로, '이 멋진 영화상을 받게 되어 특별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 영광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어 충분히 쓸 수 있는 단어라 하겠는데 앞의 ’snobbish‘라는 단어는 '고상한 체'라는 말로만 설명되기가 좀 어렵다.​

 

’snobbish‘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형용사로서

 

“1. 속물적인 2. 고상한 체하는 3. 우월감에 젖어 있는” 이런 뜻으로 나온다. 전체적인 뜻을 보면 좋지 않은 뜻이다. 뭔가 많이 든 척, 뭔가 멋있게 사는 척, 뭔가 다른 사람보다도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단어의 명사형인 ’snob‘나 여기서 파생된 ’snobbery‘라는 단어에는 속물근성, 잘난 척하는 우월의식,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란 뜻이 강하다. 그러니 전반적으로 보면 이 ’snob‘가 들어간 단어들은 속물을 비꼬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윤여정 씨의 소감의 앞부분만 들으면 우리 언론의 번역은 '고상한 척하는'이란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속뜻은 ' 아주 고상한 척하는, 속물적인 사람들로 알려진 영국사람들'이란 뜻이 된다.​

 

처음 그 소감만을 들었을 때 영국 사람들은 "아니 기껏 상을 주는데, 우리를 아주 속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야?" "아니 이게 무슨 망발이람? 우리를 우습게 보는군..." 하고 흥분하기에 십상이다. 실제로 영국인들이 놀란 것 같다. 영국 BBC뉴스의 수상소식 보도도 그런 의식을 깔고 있다. BBC의 연예담당 닐 스미스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의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에서의 활약으로 조연여우상자로 호명 받자 환호했다. 그런데 그녀가 영국사람들을 "아주 ’snobbish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녀의 감사함을 전하는 방법으로는 이상한 것이었다."

 

 

윤여정의 소감에 대해서 우리 언론 보도를 보면 '점잖은' 영국인들은 그 당시에는 활짝 웃음을 터트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뒤 기자회견에서 윤여정 씨가 덧붙인 설명을 하지 않았으면 영국인들이 정말로 화를 낼 뻔했다. BBC보도의 다음 문장에서 영국 사람들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올해 73살의 윤여정씨는 영국에서 인정받아서 영광이라고 했으며 영국에는 10년 전 케임브릿지 방문을 포함해서 여러 번 방문했다고 했다. 나중에 상을 받고 나서 취재진들에게는 '그때 snobbish라고 느낀 것은 나쁜 뜻이 아니라 영국의 긴 역사와 그들의 자부심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Snobery’란 말은 그러니까 그녀의 의도로 보이는데, 단순히 높은 기준과 분별해내는 취향을 의미한다면, 뭐 좋은 뜻일 수도 있다."

 

소감을 잘 보면 영국사람들이 '고상한 체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상한 체하는 사람들로 알려진'이란 식으로 인용화법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나쁜 뜻이 담긴 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녀가 좋은 뜻으로 말하려 했을 것 같고, 그녀가 뜻한 대로 높은 기준ㆍ취향을 말하려 했다면 그것은 욕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영국인들이 처음 당혹함을 느꼈을 것인데도 굳이 그녀의 설명을 들어주고 그것을 일종의 유머로, 좋게 이해 해주려 한 것을 보면 확실히 영국인들은 교양이 있고 유머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그런 수상소감이 나왔다면, 일단 나중에 덧붙여 설명한다고 해도 버릇없는 건방진 소감이라고 들고 일어났을 가능성을 (물론 그러지는 않겠지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머를 던지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을 더욱 많이 공유할수록 그 사회는 건강하고 유쾌해진다고 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영국인들에게서 유머능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수상소감을 윤여정 씨는 미리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듬거리는 영어 같으면서도 고도의 수사법을 담아 슬쩍 영국인들의 코털을 건드리는 척하면서 그들을 칭찬한 것이다. 그냥 곧이곧대로 "이런 멋진 영국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기쁘고 영광됩니다."라고 했으면 영락없이 서양병에 걸린 동양인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반전 포인트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참으로 아슬아슬하면서도 멋진 수상소감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일상의 대화도 되도록 유머를 많이 넣어 상대방을 비꼬면서도 금방 화내지 않게 할 말을 하는 영국인들의 특질을 역으로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 아카데미상은 반가운 것이다. 바로 1년여 전 이 영국 아카데미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리지널 각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는데, 그 여세를 몰아서 미국의 오스카, 곧 아카데미상에서 4개 부문 수상한 것을 보면 이번 수상으로 미국에서의 수상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의 영화제에서 한국인이 연기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작품상이나 감독상 등은 영화에 대한 것이지만 영국에서의 연기상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약간은 어설펐을 윤여정의 미국에서의 영어가 영어권 사람들에게 의미있게 보였음을 알 수 있겠다. 며칠 전인 지난 4월 4일(현지 시간) 비대면으로 열린 미국배우조합(SAG)상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이미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바 있다.

 

그녀의 이름이 불리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제가 서구에서 인정받았군요. 정말, 정말 영광이에요. 특히 배우 동료들이 저를 여우조연상에 뽑아줬다는 게요.”라고 영어로 말했는데 비영어권 사람들이 미국과 영국에서 연기상을 받는 것이 그처럼 어려운 것이기에 그 속에 처음 이뤄낸 성과에 대한 놀라움과 자부심이 담겨 있음을 알겠다. 한국 연기자들이 유럽 영화제에서 여러 번 상을 받았지만, 미국과 영국에서는 처음이라는 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작품상과 감독상 등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상은 받았지만, 연기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상을 받기도 어렵지만, 막상 상을 받는 순간 어떤 수상소감을 하는가도 상당히 중요한데 근래에 우리 배우들, 감독들의 수상소감도 점점 세련되어가고 있는 듯해서 덩달아 기분이 좋다. 왜냐하면 멋진 수상소감은 영화를 뛰어넘어 그 나라 사람들의 해학과 교양과 문화수준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전 세계인들이 보는 가운데 멋진 소감을 말하는 순간 그것 자체도 우리나라의 수준을 자랑하고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오스카상에서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이 멋진 영어로 번역이 되어 화제가 되었듯이 윤여정 씨가 오스카 상을 받으면서 그 수상소감이, 틀림없이 영어로 할 것이지만, 아이스크림과 같은 시원함과 산뜻한 촌철살인의 의미를 담아준다면 그것 또한 우리들을 즐겁게 해줄뿐더러 한국인들의 유머를 세계에 보여주는 큰일이 될 것이다.​

 

윤 씨가 오스카 연기상을 받는다면 64년 만에 아시아계 여배우가 오스카 연기상 트로피를 가져가게 된다고 한다. 이번 영국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2주 뒤 열릴 미국 아카데미, 오스카 시상식에서 윤여정의 연기상 수상과 이번처럼 교묘하고 멋진 유머를 담은 수상소감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