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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효심깊은 임금, 인종의 무덤 효릉(孝陵)

고양시 서삼릉에 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양시 원당동에는 한양의 서쪽에 3기의 왕릉이 있다고 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 이름 붙인 왕릉들이 있다. 참고로 옛날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어느 방향에 몇 기의 왕릉이 모여 있으면 방위에 왕릉의 기수를 붙여서 불렀다.

 

예를 들면 가장 많은 왕릉이 모여있는 구리시에는 9기의 왕릉이 모여 있어서 '동구릉'(東九陵)이라 불렀고, 서쪽으로 5기가 모여있는 고양시에는 '서오릉'(西五陵)이라 불렀으며,  서오릉과는 좀 떨어진 곳에 3기의 왕릉이 있어 이곳은 '서삼릉'이라 부르는 식이다.

 

왕릉이 2기 있는 경우에는 2기 능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여를 들면 강남구에 있는 2기의 왕릉은 선릉과 정릉을 합하여 '선정릉' 이라 부르며, 서초구에 있는 2기의 왕릉은  헌릉과 인릉을 합해서 '헌인릉' 이라고 부르른다.

 

오늘 탐방해 본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에는 먼저 중종의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禧陵)과  중종의 '정릉'(靖陵)이 있었으나, 중종의 정릉은 후일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으로 이전하였고, 이어서 중종의 아들이었던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의 합장묘인 '효릉'이 세워졌다.

 

그리고 조선 후기 강화도령이던 철종과 비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이 세워져 현재 3기의 왕릉이 있는서삼릉이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외에도 조선시대 임금들의 태실이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하여 전국의 명당터에 모셨던 태들을 강제로 모아놓은 것으로 조선 임금들의 존엄을 훼손한 일본인들의 만행 가운데 하나다.

 

또 왕릉들이 있는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설이 하나 더 있는데, 이는 1970년대 서삼릉 주변에 우거진 나무숲을 베어내고 풀을 심어 말을 키우는 종마목장을 조성하여 왕릉으로서의 품격을 손상한 것이다. 이런 시설이 일본인들도 아닌 광복 이후에 우리가 만들었다는 것에 더 큰 반성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때만 해도 서울 외곽에 널려있는 조선왕릉은 고귀한 왕조의 존엄성을 상실한채 소풍들의 놀이터 였을 뿐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역사가 된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재평가되고, 세계 역사상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 보존된 왕릉들의 가치가 인정되어 인류역사상 한 왕조의 능들이 모두 보존된 유일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어 현재 조선왕릉은 모두 합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왕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삼릉 종마목장은 속히 이전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올리는 서삼릉 효릉은 조선 제12대 인종(仁宗,  재세 1515년 음력 2월 25일~1545년 음력 7월 1일, 재위 1544년 음력 11월 20일~1545년 음력 7월 1일)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1514~1577)의 무덤으로  인종은 왕위에 오른지 겨우 9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인종은 생전에 효성이 깊었던 왕으로 부모의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먼져 와 있던 아버지 중종과 자신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 장경왕후의 정릉(靖陵) 옆에 능을 쓰게 되었으나, 인종의 유언과는 어긋나게 아버지 중종의 정릉은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옮겨갔다. 

 

인종은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유언을 남겼다 하며, 당시 뒤를 이은 명종과 문정왕후 측의 상례절차를 줄이려는 의도(?)에 따라 검소하게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훗날 인종의 비였던 인성왕후 박씨가 1577년(선조 10)에 세상을 떠나자 인종의 옆에 왕비릉을 조성하면서 인종의 왕릉에는 병풍석과 봉분 외부에는 난간석까지 설치하여 보다 품격을 갖추어 왕비릉과는 차이가 나게 하였다. 

 

인종은 왕위에는 너무도 짧은 9개월 동안 있었지만 기묘사화로 폐지되었던 과거제인 현량과를 부활시키고, 또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희생된 신진 사림파의 거두였던 조광조 등을 복권하여 한을 풀어주기도 하였다. 인종의 어머니는 장경왕후 윤씨인데 그녀는 인종을 낳은후 산후증으로 7일만에 죽었고, 어린시절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그늘에서 자라났으나, 늘 정신적으로 문정왕후에 시달림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중종의 큰아들로 태어나 어렵사리 왕위에 까지 올랐으나 겨우 9달 만에 죽고 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종은 몸이 약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문정왕후가 독살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죽었을 때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인종은 생전에 아버지 중종과 계비였던 문정왕후에게 늘 지극한 효심을 보였다고 하여 그의 능호를 효릉(孝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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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