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귀퉁이의 민속박물관 자리에 있다가 헐린 중앙청에 있다가 고궁박물관 자리로 옮기는 진통 끝에 2005년에야 현재 자리에 크고 새롭게 지어지는 파란만장한 역사가 있다.
이 박물관의 상설전시관을 들어서면 큰 홀 한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된 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바로 경천사 10층 석탑이다. 국보 제86호인 이 경천사 십층석탑은 높이 약 13.5m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어 무척 아름답다. 그러기에 전시관에 들어서면, 홀 중앙에서 천정까지 치솟는 위용으로 해서 중앙박물관의 얼굴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 탑은 고려말기 원나라에 기울어져 있던 고려 귀족들이 발원했고, 탑의 외형은 우리나라에 있는 기존의 간결한 석탑과는 달리 원대에 유행한 라마교의 요소가 많으며, 탑을 만든 사람도 원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어서, 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문화재로는 인식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올 10월에는 전혀 다른 문화재를 만나게 된다. 바로 우리 조상의 뛰어난 기술과 예술관, 심미안을 보여주는 뛰어난 청동 조각 두 점이 이 박물관의 얼굴로서 나란히 관람객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올해 초 취임한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국보 제78호와 제83호 등 두 점의 ‘반가사유상’을 국립중앙박물관을 상징하는 브랜드 문화재로 선정하고 박물관 2층 기증관 입구에 440㎡ 규모의 전용 공간에 조성해 두 반가사유상을 상설 전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반가사유상은 해마다 관람객 만족도 조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품으로 뽑혔지만, 특별전을 빼면 두 분을 함께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전시실처럼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누구라도 반드시 들러야 하는 상징적 장소로 만들어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메트)은 2013년에 신라문화의 우수성을 조명하는 '황금의 나라, 신라'전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23일까지 열었다. 그런데 박물관 측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반드시 보내 달라고 해서 국내에서 어렵게 나라 밖 반츨승인을 받았다. 이때 국보 제191호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제90호 경주부부총 금귀걸이 등 신라의 대표 국보가 총망라되었는데 특히 이 반가사유상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뉴욕전은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둔 바가 있다.
반가사유상은 여타 불상과 비교할 때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이다.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부처가 어린 시절 인생무상을 느끼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뇌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설명된다.
사유상은 또 미래불인 미륵불과 연관돼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56억 7,000만 년이 되는 때, 미륵보살이 세상에 나와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272억 명의 사람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한다는 사상인데, 미륵보살이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기는 모습을 담은 것이 곧 사유상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반가사유상의 명칭도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말하자면 먼 미래에 인류구원을 상징하는 예술표현이다.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은 83호를 포함해 78호, 118호 등 3점인데 이 가운데 83호와 함께 78호가 반가사유상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함께 전시된다.
83호는 '우리 국보의 대표 얼굴'로 얘기될 만큼 한국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조화로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신체와 선명한 이목구비, 자연스럽고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표현은 신라인의 놀라운 주조 기술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은은하게 퍼지는 고졸한 미소는 종교적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는 이 미소에 대해 "슬픈 얼굴인가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지 않고, 미소 짓고 있는가 하면 준엄한 기운이 누르는,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이라고 묘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골동품상에서 구입해 이왕가미술관(덕수궁미술관)에 소장했다가 광복 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소유권이 넘어왔다. 경주의 노부부가 나정 인근의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오릉에서 찾은 것이라고 전해져 왔으며 제작 시기는 '7세기 전반 신라시대', 구체적으로 선덕여왕 시기라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78호는 1912년 일본인이 입수해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준다. 보관 위에 초승달과 둥근 해를 얹어 놓은 일월식(日月飾) 장식이 눈길을 끈다.
78호는 크기는 83호보다 조금 작지만, 전체적인 선이 더 화려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보관은 이란 사산조 왕관에서 유래했다.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하반신만 발굴된 반가사유상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백제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83호 하면 늘 함께 거론되는 불상이 있다. 일본 국보 제1호 고류지(廣隆寺)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며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 있는 예술미의 극치"라고 극찬했던 불상이다. 놀랍게도 두 불상은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외관이 비슷하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13년(603)조에 "쇼토쿠 태자가 모든 대부들에게 '나에게 존귀한 불상이 있다. 누가 이 불상을 가져다 예배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진하승(秦河勝)이 나와 '제가 예배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즉시 불상을 받았다. 그리고 봉강사(蜂岡寺)를 세웠다"라고 기술돼 있다. 쇼토쿠(聖德·574~622)태자는 일본의 첫 번째 여왕이던 제33대 스이코 일왕(554~628·재위 592~628)때 왕을 대신해 섭정을 했던 인물이다. 진하승(秦河勝)은 교토(京都) 호족으로 신라인이었다. 봉강사(蜂岡寺)는 교토 고류지(廣隆寺)의 옛 이름으로 신라 진씨 가문 절이었다.
이를 근거로 83호와 목조반가사유상은 6세기 초 신라에서 조성됐고 이 중 목조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본다. 1994년 일본 국보수리소 다카하시 준부도 "두 불상은 같은 공방에서 한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83호가 고류사 불상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보이는 목조상은 메이지 시대 때 수리를 한다고 하면서 원래의 얼굴을 일본식으로 살짝 바꾸어 놓았기에 수리 전의 얼굴이 더 83호와 가깝다.
특히 우리의 83호는 무게 112.2㎏에 높이가 93.5㎝인데 청동으로 이같이 큰 작품을 주조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한다. 청동의 두께는 5㎜에 불과한데도 흠집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목조보다 훨씬 어렵고 또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는 까닭이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반가사유상의 미소와 사유의 철학은 국내는 물론 나라 밖에서도 전시될 때마다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라며 “올해 10월 현대적 건축미가 어우러진 전용 공간에 두 반가사유상을 모시고, 시공을 초월해 감동과 영감을 주는 인류 문화유산으로서 반가사유상이 지닌 가치를 전달하겠다”라고 말했다. 불교문화재인 불상이 종교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예술품으로 올라서는 셈이다. 올 10월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대가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