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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죽음을 무릅쓴 만주 정착 과정

경북인의 만주망명 110주년 기획 보도 <5>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모두 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5편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넌 독립운동가들이 척박한 만주땅에 정착해가는 과정을 다뤘다.

 

음력 1월 27일, 석주 이상룡 선생의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 도착한 뒤 마차 두 대를 마련하여 서너 사람씩 나눠 타고 만주지역 안쪽으로 이동해갔다. 《서정록》을 보면 당시 간혹 추위가 풀리면 흙바닥이 진흙탕이 되어 수레바퀴가 빠져 곤욕을 치렀고, 또 객점을 지나며 허기를 달래기 위해 사 먹은 음식도 입에 맞지 않거나 아이들은 아예 삼키지 못해 병이 생기거나 했다고 한다. 단동에서부터 힘겹게 이동한 석주 선생 일행은 8일 뒤인 2월 7일에 횡도천이라 불리는 항도촌에 도착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유하현 삼원포였지만, 혹독한 추위와 산모들 때문에 이곳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그러면서 석주 선생은 이곳에 미리 와 있던 백하 김대락 등을 만났다.

 

 

 

항도촌에 머무는 동안 백하 선생은 손자를 얻는 경사도 있었지만, 늘 불안에 떠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특히 청나라 관리가 망명 한인들에게 변발과 호복을 강요하거나 일제가 서간도에 들어온 한인 40여 명을 체포해갔다는 등 한인들을 위협하는 소문이 난무했다. 이처럼 이들 일행이 만주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세 가지 죽을 고통을 극복해야 했는데, 첫째는 ‘얼어 죽는 것’이고 둘째는 ‘굶어 죽는 것’, 셋째는 ‘병들어 죽는 것’이다.

 

이후 항도촌에 머물던 석주와 백하 일행은 아들 이준형과 김형식을 유하현 등지로 미리 보내 정착 준비를 진행했는데, 당시 유하현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인심이 흉흉하여 되돌아오기도 했다. 백하는 4월 9일 석주와 작별인사를 나눈 뒤 11일 유하현으로 출발하여 18일에 도착했다. 석주는 이보다 조금 뒤 5월 하순 무렵 항도촌을 떠나 유하현 근처인 통화현 영춘원으로 들어갔고, 다시 10월 무렵 유하현 삼원포의 대우구로 옮겨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 일행은 만주망명의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에 정착하고도 순탄치 않은 생활을 이어간다. 가장 먼저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해 땅을 개간하여 식량을 생산해 내야 했고, 도적 등 외부 침입에 대비하는 내부 단속에 힘써야 했고, 특히 향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면 한인 동포사회의 결속을 다져나가야 했다. 이를 위해 만주땅의 주인, 곧 중국을 상대로 자치권을 획득하고 토지를 확보해야 했는데, 이때 석주 선생은 망명 한인들에 대한 중국 측의 경계와 불신을 무마하고자 중국 동화의 길을 선택했다. 곧 변발에 중국식 복장을 하고 또 중국인 호적에 입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한편 석주 선생은 《석주유고》의 <중화민국 국회에 제의하는 글>에서 한인들이 만주에 정착하게 되면, 첫째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재력에 도움이 되고, 둘째 황무지 개간에 유리하며, 셋째 만주지역의 비루한 풍속과 백성들의 지식 계발에 도움 되고, 넷째 몽골을 정벌하고 러시아를 막는 데 도움이 되며, 다섯째 일본과 러시아를 방어하는 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열거하면서 망명 한인들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한인 동포들에게 산업에 주력하고, 교육을 장려하며, 사회단체 결성을 통한 권리를 획득하는 등의 강령을 제시하며 내실을 다져갔다. 결국 이러한 노력이 독립군 양성과 무장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