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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동대문운동장 출토유물 보존처리해보니 ‘19세기 총검’

[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서울역사박물관(관장 배현숙)은 조선시대『훈련도감(訓鍊都監)의 분영인 하도감터(下都監)』에서 출토된 19세기말 근대식 소총에 사용한 총검을 보존처리하여 동대문역사관(중구 을지로 281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 공개하였다.

 

동대문디지인플라자(DDP) 건설을 위해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이루어진 동대문운동장 발굴조사 과정에서 하도감 관련 ‘칼’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보존처리 결과 조선후기인 19세기 말 국내에 들여온 근대식 소총에 사용된 총검인 것으로 밝혀졌다. 총검이란 대검(帶劍)이라고도 하며, 소총에 장착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검(劍)을 뜻한다.

 

 

이 총검(銃劍)은 보존처리 전까지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과 관련된 일본제 칼(刀)인 것으로만 추정하고 있었다. 1882년 이전 하도감 터는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이 있었던 자리로 1881년에 설치된 신식군대인 교련병대(敎鍊兵隊) 즉 별기군(別技軍) 이 훈련한 장소이다. 또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현장이며, 군란의 원인으로 지목된 별기군이 해체된 이후에는 군란을 진압한 청군(靑軍)이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에 패하기 전까지 주둔한 장소이다.

 

최근 실시된 보존처리 과정에서 칼의 전체적인 형태와 MRD(Muzzle Ring Diameter) 정밀 측정 결과를 근거로 볼 때 조선 후기인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개발된 소총에 사용된 총검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19세기 말 국내에 들어온 근대식 소총에 실제로 사용된 총검이 출토된 사례는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고승호’에서 인양된 청나라 군대가 사용한 총검 이외에는 없다.

이 총검은 전장 71.6cm, 도신 57.5cm, 자루 13.5cm의 크기로 손잡이는 동물성 가죽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보존처리 전 총검은 손잡이 부위를 제외하고는 금속 부식화합물로 인해 세부 형태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며, 특히 검집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남아있는 검집 금속장식의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연못이라는 수분이 많고 공기가 차단된 환경에 매장되어 금속에 비해 재질적으로 취약한 동물성 가죽 손잡이가 잘 남아 있었다.

 

보존처리는 세척, 부식화합물 제거, 도금표면 표출, 안정화, 복원 등 총 5단계를 거쳐 실시되었다. 보존처리 결과 유물을 덮고 있었던 금속부식 생성물이 대부분 제거되어 총검이 지니고 있었던 형태적 특징들이 복원되었으며, 검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검집 일부분인 금속장식은 음각된 문양과 세부 형태 그리고 금도금된 표면이 표출되었다.

 

하도감터 출토 총검은 중국 또는 일본을 통해 19세기말 국내로 유입되어 조선군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서양식 총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유물로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들어온 근대식 소총과 그와 관련된 유물들은 두 번의 수난 즉 일제가 조선 정부를 앞세워 1907년 반포한 ‘총포급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과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조선총독부박물관 병기류 양여 및 처분’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사라졌다.

 

‘총포급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은 1907년 일제가 순종황제로 하여금 반포토록 한 법으로 같은 해 강제적으로 해산시킨 대한제국군의 해산군인들이 무기와 탄환을 탈취하여 의병전쟁에 합류하자 의병들의 저항을 막고 무기류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기를 압수하고 폐기한 사건이다.

 

‘조선총독부박물관 병기류 양여 및 처분’은 1941년 8월 조선총독부가 태평양 전쟁에 사용할 목적으로 공포한 ‘금속 회수령’을 근거로 1944년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 무기류를 공출하여 1,600여점을 녹여서 무기로 제작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