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모든 식물은 다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데, ‘이름 없는 풀’이라고 한다면 그 풀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그래 나에게도 이름이 없고 "어이 거기 이름 없는 사람?"하고 부르면 "왜 멀쩡한 남의 이름을 놔두고 그렇게 부르는거야?"라며 짜증이 날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그 많은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들 이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얼마나 불러 주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십 년도 더 전인 2009년, 부산에 있을 때 일간신문에서 이런 글을 본 이후였다.
"와! 신갈나무, 너 참 튼튼하게 생겼구나, 얼레지 오랜만에 만나네. 기린초가 있는 것을 보니 붉은점모시나비도 찾아오려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숲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을 비로소 하나하나 구분하여 알아본다는 의미이며, 식물과의 인연의 시작을 말한다. 시인의 말처럼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듯이 우리가 이 나무들을, 풀들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은 의미가 되고 의도가 되며, 행복과 지혜를 건네기도 하는 그 무엇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까지 몰랐던, 눈부시게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을 다시 여는 열쇠가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유미, ‘나무와 풀, 그 이름 불러줄 때’. 부산일보 2009.07.03
그러다가 내가 더 몇 년 전인 2003년에 쓴 글 제목이 생각났다.
"개쉬땅나무를 아세요?"
이 제목의 글은 여의도공원을 산책하면서 본 이상한 '개쉬땅나무'라는 꽃나무 이름을 보고는, 그 꽃나무를 키워드로 해서 여의도공원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과정과 나와의 인연을 쓴 것인데, 지금 다시 말하고 싶다.
"여러분 개쉬땅나무꽃을 보셨나요? 못 보셨지요? 여기 보세요!"
우리 동네 아파트 단지 길을 내려가다가 문득 발견한 꽃 팻말과 화려하고 너무나 눈부신 꽃을 보아서 나 혼자 보기에 아까웠다. 요즘 휴대전화 전파 때문에 멸종되고 있어 좀처럼 보기 어려운 벌들도 꿀을 빠느라 여념이 없다. 정말로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이 꽃과 나무. 백과사전을 보면 이렇다.
"서개쉬땅나무ㆍ마가목ㆍ밥쉬나무라고도 한다. 산기슭 계곡이나 습지에서 자란다. 높이 2m에 달하며 뿌리가 땅속줄기처럼 뻗고 많은 줄기가 한 군데에서 모여 나며 털이 없는 것도 있다. 잎은 어긋나고, 깃꼴겹잎이다. 작은 잎은 13∼25개이고 바소꼴로 끝이 뾰족하며 겹톱니가 있고 잎자루에 털이 있다. 꽃은 6∼7월에 흰색으로 피고 지름 5∼6mm이며 가지 끝의 복총상 꽃차례에 많이 달린다....."
뭐 상당히 설명이 복잡한 것 같지만 사진 한 장을 보면 다 이해된다. 조그만 좁쌀 같은 몽우리들이 줄기 끝에 모여있다가 나중에 꽃으로 변한다. 우윳빛의 꽃은 마치 응원할 때 손에 쓰는 채 같은 하얀 것이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요즘 한창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참 뭐해서, 개쉬는 뭐고 땅은 뭔지 모르지만, 어찌 됐든 아름다운 꽃이고 이름을 알게 되니 그것으로써 이 꽃도 살아난다. 좀 특이한 이름이기에 더 재미있는 측면도 있다.
'이름'이라고 하면 우리가 아는 그 시(詩), 누구의 것이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꽃, 김춘수
2009년 부산일보에 글을 올린 이유미 씨는 이 글로 전국에 유명해졌고 곧 국립수목원의 원장으로 발탁돼 전국에 꽃과 식물 이름 알기 운동의 전도사가 되었다. 지금은 핸드폰 렌즈만 갖다 되면 그 이름이 어플에 나오지만, 그 이전이라도 사람들은 식물도감을 사 들고 산과 들을 누비고 하던 게 다 이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2003년에 개쉬땅나무를 아느냐고 묻는 글을 발표할 때 필자는 서 여의도공원이 아스팔트 바닥에서 푸른 정원으로 바뀐 것을 칭찬하면서 더 많은 녹지를 우리가 확보하고 그 혜택을 누리자는 뜻으로 썼는데, 최근 여의도공원을 다시 가보면서 그때 필자의 작은 염원이 마침내 이뤄졌음을 알고 감격한 적이 있다. 이제 집 근처 화단에서도 이 꽃나무를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유미 씨는 지금도 국립세종수목원의 원장으로서 우리나라 수목의 발굴과 보존, 보급 등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개 사물은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사람이 그 이름을 붙인다. 꽃이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또 어찌 꼭 이름을 붙여야만 하겠는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첫 문장과 비슷한 이런 말은 한 사람은 18세기를 산 유명한 실학자 신경준(1712~1781)이란다. 그는 열심히 문헌을 연구하여 해박한 지식을 쌓은 뒤 전국을 발로 다니며 우리나라 지리학을 개척한 선구자였고 그의 학문의 출발은 사물의 정확한 이름을 아는 것이었다고 한다.
풀이나 꽃, 나무의 이름 하나에도 그 나라의 풍토와 인정과 역사가 담겨 있으니, 이름을 모르는 것은 그 속의 많은 이야기를 모르는 것이 된다. 또한 그 이름에는 삶의 지혜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엉겅퀴'는 피를 엉기게 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어서 신약을 연구하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금강초롱'은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된 초롱꽃과 유사한 식물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이런 꽃나무들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도 많다. 앞의 금강초롱은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인데 전 세계가 함께 쓰는 학명은 애석하게도 '하나부사야 아시아타카 나까이(Hanabusaya asiatica Nakai)'다. 일제 강점 때에 나카이라는 일본인 학자가 이 식물을 발견하고 하나부사라는 지인의 이름을 붙여 먼저 공포한 것이란다. 우리가 라일락이라고 부르는 식물도 우리는 외래식물이 아니라지만 사실은 우리나라에 자라고 피는 ‘수수꽃다리’라는 것을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 주지 않던 사이에 식물들이 화가 나서 외국으로 망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장난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숱하게 많은 시간, 왜 시간이 가지 않느냐고 불평을 하고 싶은 우리 젊은 친구들, “왜 이 산에는 그리 쓸데없이 풀과 나무가 이리 많은 거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혹 그 시간에 식물도감을 펴놓고 꽃 이름을 외우고 나무와 풀의 종류를 구별하는 공부 한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
아주 오래전에 이유미 원장의 바람은 이제 휴대전화의 어플로 대신해 이뤄지고 있다. 산에 가보면 휴대전화을 들이미는 분들을 많이 본다. 이런 젊은이들이 꽃과 식물의 바른 이름을 알듯이 우리 사회의 현상에 대해서도 바른 이름으로 바른 생각을 얻어 우리 사회를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이 개쉬땅나무 꽃술 하나하나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