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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광복 뒤 우리 기술로 만든 첫 음반 ‘애국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65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축음기와 레코드가 소개된 것으로 알려진 1890년 이후 우리나라의 음반 시장은 우리 기술이나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인의 마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약 20개 정도 음반회사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1933년 이후로는 콜럼비아ㆍ오케ㆍ빅타ㆍ포리돌ㆍ태평 등 5대 음반사가 음반시장을 장악했지요. 하지만 이런 음반사들은 일본 음반사들의 자회사였기에 광복과 함께 이름마저 사라졌습니다.

 

광복 이후 민족자본에 의한 음반산업이 등장할 기회가 되었는데 1947년 8월 5일 고려레코드가 처음으로 국산 음반을 제작하면서 국내 음반산업이 걸음마가 시작되었지요. 첫 음반은 광복에 맞춰 '애국가'가 그 문을 열었습니다. 그 소개를 보면 합창에 음악대학 합창단, 독창에 송진혁, 지휘에 김성태, 피아노 반주에 최성두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음반에는 ‘조선의 노래’, ‘건국의 노래’, 해방기념가‘, ’계명의 노래‘ 등도 녹음돼 있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음반 제작 기술을 배울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힘겹게 음반제작을 이루어낸 것으로 원반 1장을 다듬는 데만 한 시간 이상 걸렸음은 물론, 가수나 반주자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녹음하던 것을 버리고 새 원반에다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당시는 녹음실이 없어서 여관을 빌려서 녹음했는데, 방음이 안 되었던 여관인 탓에 창에 담요를 치고 녹음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또 3년여 동안 30여 회 취입하고, 80여 톤의 석탄을 사용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한 것이어서 그야말로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언론들은 “조선문화에 많은 공헌이 있을 것이라 한다.”라고 칭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