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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단국대 설립에 얽힌 이야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7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당 이회영과 범정 장형의 발자취를 따라서》 책을 보면서, 우당과 범정의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범정 선생이 어떻게 단국대를 설립하게 되었는지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단국대 설립에 관해서도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29일 광복된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듬해 3월 3일 국민대학 설립기성회를 발족시킵니다. 《백범일지》에 이런 말이 나오지요.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문화의 나라가 되기를 바라던 백범이었으니, 백범이 중심이 된 임시정부도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국민대학 설립기성회를 발족시킨 것이지요. 범정은 이 기성회에 독립운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사진에 참여합니다. 국민대학은 1946년 9월 1일 개교합니다. 그렇지만 기금 모집이 원활하지 않아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국민대학관(야간)으로 출발합니다. ‘학관’이란 광복 직후 유행했던 학제로 전문학교 수준의 학교라고 하지요. 그나마 기금 모집에도 범정 선생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국민대학관의 초대 학장은 해공 신익희가 맡고, 범정은 이사장을 맡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갈라섭니다. 1947년 7월 해공이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것이 원인이었지요. 오해에서 비롯된 탈당이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신탁통치를 하려고 할 때 임시정부는 당연히 반탁운동을 벌입니다. 이때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으로서 정치공작대를 운영하던 해공은 강력하게 반탁운동을 벌입니다.

 

그러자 미군정은 이를 ‘임시정부의 쿠데타’로 받아들여, 임정 요인들을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까지 세웠답니다. 해공은 이때 미군정에 구금되어 신문까지 받았다고 하고요. 그래서 임정은 결국 미군정의 압력에 굴복하여 정치공작대 해체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해공은 이를 참지 못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이승만이 주도하던 독립촉성국민회에서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한국독립당도 탈당하여 한국민주당에 입당합니다.

 

그러자 범정은 해공이 백범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하고 해공이 학장을 맡은 국민대학과도 결별합니다. 원래 국민대학에는 직접 압록강까지 건너다니며 범정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조희재 여사가 토지 5만 평을 기부하기로 하였는데, 범정이 국민대학과 결별하자 조 여사도 이 약속을 철회합니다. 이후 국민대학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1959년 기업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김성곤이 인수하면서 정상화가 됩니다. 저는 국민대학이 왜 학교 이름에 ‘國民’을 넣었나 했더니, 이런 연유가 있었군요.

 

국민대학과 결별한 범정은 민족진영의 여러 인사와 협의하여 임시정부와 백범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할 대학을 별도로 설립하고자 했으니, 이게 바로 단국대학입니다. 그럼 왜 학교 이름을 ‘단국(檀國)’이라고 했을까요? ‘단(檀)’하면 ‘단군(檀君)’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예! 단군의 건국정신을 고취해야 한다는 뜻에서 ‘단국’으로 한 것이지요. ‘단군’ 하면 따라 나오는 것이 또 ‘홍익인간’ 아닙니까? 그래서 ‘홍익인간’도 단국대의 교육이념이 되었습니다.

 

범정이 단국대를 설립한다고 하니까, 조희제 여사가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아마 국민대에 기부하려고 하였던 토지 5만 평도 단국대에 기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범정 선생이 군자금을 모을 때 이를 지원하였던 김제, 익산, 정읍을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 곡창지대의 지주들 또한 범정 선생을 돕습니다.

 

이리하여 1947년 11월 1일 단국대 인가가 나옵니다. 범정 선생은 같은 달 인가서가 나오자 이를 들고 조 여사를 찾습니다. 조 여사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홍익인간의 뜻을 따라 할 일을 다 한 듯하시다고 말씀을 하신 다음 숨을 거둡니다. 조희제 여사, 그리고 뒤를 이은 조여사의 딸 박정숙 여사가 단국대에 이바지한 공이 크기에 단국대에서는 조 여사가 세상을 떠난 11월 3일을 개교기념일로 정하여 조희재 여사를 추모한다는군요.

 

 

범정이 단국대를 세우자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신 분이 백범입니다. 범정이 교육계에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고 그래서 범정을 교육계로 이끌었던 백범이기에 그렇게 기뻐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백범은 단국대 설립 직후인 1948년 1월 범정의 집을 방문하여 친히 격려도 하고, 단국대 제1회 졸업식 때에는 몸소 졸업식에 참석하여 축사도 합니다.

 

단국대 설립에 이렇게 범정을 중심으로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뜻을 모았고, 또 일제 강점기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범정을 도왔던 의식 있는 지주들이 힘을 보탰군요. 단국대는 이렇게 민족의 대학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충식 선생이 아버지 범정의 뜻을 잘 받들어 오늘의 단국대로 발전을 시켰고요. 저는 예전에 고시 공부할 때에 집에서 가까운 단국대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었는데,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단국대 도서관을 드나들었습니다. 지금 단국대는 예전의 한남동을 떠났지만, 언제 한 번 단국대를 찾아가 단국대 교정을 거닐면서 범정 선생의 단국대 설립의 뜻을 되새겨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