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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무인 출신으로 으뜸 과학자 되다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2] 이천(李蓚) - ①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으뜸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까닭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은 장영실이 노비 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으뜸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국사학과 교수들은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서울대 문중양교수)를, ‘이순지와 이천’(전북대 김근배교수)을 꼽았다.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은 2003년 1월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사회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마련했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과학기술인 15인 가운데 세종 때 △이천 △장영실 △이순지 3명이 들어갔다.

 

세종대왕의 재위 기간인 1418∼1450년은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볼 때 국책사업으로 과학기술을 이끌어 천문학은 물론 활자 인쇄, 도량형, 화약, 농업, 의약, 음악 분야 등 과학기술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세종이 임금이 된 1418년은 아직 새 왕조가 개창된 지 겨우 20여 년밖에 안 된 초창기이므로 잘못하다가는 구세력이 반발하여 새 왕조의 틀을 뒤흔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세종의 남다른 점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 천거되면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적의적소에 임명하여 그의 역량을 발휘토록 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소위 '과학기술 프로젝트'를 창안하여 국가의 모든 역량이 투입되도록 했다.

 

이천(1376∼1451)은 무신 출신이지만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에서 지휘자이자 감독자로서, 이순지는 이론을 담당하는 과학자로서, 장영실은 실제 제작과 개발을 담당한 기술자로서 역할을 수행토록 했다. 세종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세 명의 과학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분야를 전공분야로 갖고 있었다.

 

이천 : 천문의기 제작을 총괄 지휘한 감독자

이순지 : 이론 천문학자로서 천문의기의 이론적 뒷받침

장영실 : 천문의기를 실무적으로 제작하고 개발한 기술자

 

이천은 담당한 분야 하나하나가 모두 당시의 주요 국가적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무인(武人)으로 출발

 

조선 초기의 무신이자 과학자인 불곡(佛谷) 이천은 무신 집안 출신으로 고려 우왕 2년(1376)에 경상도 예안(본관은 예안 이씨)에서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송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천의 어머니 염씨는 고려 말 임금과 맞먹을 권력을 갖고 있던 염흥방의 누이동생이다.

 

외가는 고려말 최고의 권문세력가인 곡성 염씨 집안이었지만 염흥방의 세도가 너무 높아 비난이 많자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의 협조를 받아 염흥방을 제거한다. 이로 이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는데 염흥방에 관련된 사람은 어린아이일지라도 무참히 살해되었다.(이천의 아버지 이송 포함) 마침 이천과 그의 동생 이온은 한 승려의 도움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유년시절부터 뛰어난 무술로 그의 나이 18살 되던 해인 태조 2년(1393)에 정7품 벼슬인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태종 2년(1402)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1410년에는 무과중시(武科重試)에 합격했다. 조선 초기에는 아직 문과와 무과가 지나치게 나뉘어 있지 않을 때여서 그의 동생은 1401년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세종 원년인 1419년 왜구들이 충청도 앞바다로 침입했을 때 우군첨종제(右軍僉摠制)로 임명되었다가 곧 우군 부절제사가 되어 이종무가 대마도를 토벌할 때 참가했다. 이천은 우군을 거느린 이지실을 보좌했는데 이때의 공으로 좌군 동지총제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종2품 무관급인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이천의 과학적인 재질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였다. 이천은 군선의 물에 잠기는 부분이 빨리 썩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갑조법(甲造法,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고 군함의 선체는 크고 속도가 빨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제조된 군선이 왜구의 토벌에 크게 이바지하자 그는 과학적인 재질을 인정받았다.

 

그 전에 세종 원년(1418)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무인에서 과학자로

 

그동안 눈여겨본 세종은 세종 2년(1420)에는 곧바로 이천을 불러 금속활자를 만들도록 현재로 치면 과학기술부의 차관인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임명했다.

 

무인이던 그가 조용하다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천이 쇠를 다루는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 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주자소(鑄字所)에 술 1백 20병을 내려 주었다. 전자에 책을 찍는데 글자를 구리판[銅板]에 벌여 놓고 황랍(黃蠟)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이를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 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지휘하여 공조 참판 이천(李蕆)과 전 소윤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글씨체가 더 바르고 똑똑하여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 장을 찍어 낼 수 있었다.

 

임금은 그들의 일하는 수고를 생각하여 자주 술과 고기를 내려 주고,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찍어 내라고 명령하고, 집현전이 그 잘못된 곳을 교정하게 하였는데, 경자년(1420) 겨울부터 임인년(1422) 겨울에 이르러 일을 끝냈다.( 《세종실록》 3/3/24)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 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장수가 많게는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

 

또 하나는 표준을 정하는 일로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거래의 기준이 되는 저울의 표준화다.

 

임금이 공청이나 사가에서 사용하는 저울[稱子]이 정확하지 아니하므로, 공조 참판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개조하게 하였다. 이날에 이르러 1천 5백 개를 만들어 올렸는데, 자못 정확하게 되었으므로 안팎에 나눠주고, 또 더 만들어서 백성이 자유로이 사들이게 하였다. (《세종실록》4/6/20)

 

그는 15세기에 세계 수준을 자랑하는 천문기구 제작의 책임자였고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화약무기 개발과 악기 개량, 도량형 표준화 등에서도 실력을 크게 발휘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15세기 당시 으뜸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와 총통완구, 악기를 제작하게 되는데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였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