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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예천에 비둘기 무덤이 있는데

퇴계가 쓴 묘갈명이 전하는 사연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25]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당 태종의 치세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하거니와 이 당 태종이 정치에서 성공한 이면에는 황제의 잘못에 대해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한 위징(魏徵, 580∼643) 같은 꼿꼿한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종이 위징의 행실에 약간의 의심을 하고서 위징에게 충신(忠臣)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투로 말을 걸었다. 이때 위징은 "폐하께서는 저를 충신이 되게 하지 마시고 양신(良臣)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뜻밖의 대답을 듣고 두 말의 차이를 묻는 태종에게 위징은 '양신은 군주에게 훌륭한 위세와 명망을 가져다주어 자손만대에 이어지게 하는데 견주어, 충신은 결국 미움을 받아 주살 당하기에 십상이고, 군주에게는 혼군이라는 악명을 남겨주며 나라를 망치고 말지요."라고 하였다. 요는 충신은 왕도 문제지만 본인도 목숨을 바쳐야 충신이 된다는 뜻이며 충신이 되지 않고 양신이 되도록 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말을 해준 것이다.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충신이 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리에 가면 의견비(義犬碑)라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전설로 전해오는 충견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1955년 세워진 것이다. 의견(義犬), 곧 충견(忠犬)의 전설은 고려시대 최자(崔滋)가 지은 《보한집(補閑集)》에 실린 것으로, 김개인(金蓋仁)이란 사람이 술에 취해 집에 돌아가던 중 잔디밭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이때 인근에서 불이 나 주인에게 불길이 번지자 개가 냇가를 왕래하며 젖은 몸으로 불길을 잡아 주인은 살렸으나 스스로는 지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곧 목숨을 바쳐 주인을 살렸기에 충견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충견(忠犬)의 전설이 꽤 있어 여러 곳에 비석을 세워 기리고 있거니와, 다만 비둘기도 의로운 죽음으로 무덤을 만들어 기리는 곳이 있는 것은 우리는 잘 모른다.

 

 

경북 예천군 호명면 종산리에 가면 정절을 지킨 부인을 기리는 절부각(節婦閣)이 있고 그 옆에는 까만 오석에 ‘비둘기무덤’이라고 하얗게 새긴 비석과 함께 비둘기무덤이 있다. 절부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지붕에 목조로 된 비각으로서, "종사랑 진성 이공 복 처 절부 평산 신씨지 려(從仕郞眞城李公宓妻節婦平山申氏之閭)"라고 써 있다. 쉽게 풀이하면 진성이씨로 종사랑을 한 이복(李宓)의 부인인 평산 신씨의 여(閭)이다. 여(閭)는 마을 어귀에 세우는 문을 뜻하니 비각이란 뜻이 된다.

 

그 옆에 비둘기 무덤이 있고 그 비각 딋쪽으로 진성이씨 이복과 그 부인 신씨의 합장묘가 있다. 어떻게 비둘기 무덤이 이 두 부부 무덤 옆에 있는가?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무덤의 주인인 이복은 퇴계 이황의 4번째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의 큰아들이다. 대사헌을 지낸 온계 이해는 1545년 5월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의 명을 받고 북경을 갔는데 이때 큰아들 복이 부친을 모시고 갔다. 북경에 도착한 온계는 8월 초에 명나라 세종(世宗)을 알현하고 조선 국왕의 축하인사를 전한 뒤에 세종이 주는 도자기 두 점을 선물로 받고 사절의 임무를 끝냈다. 이어 9월에 조선으로 귀국길에 올라 통주(通州)에 이르렀을 때 수행하던 큰아들이 갑자기 풍토병에 걸려 급사하는 변을 당한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온계 등 일행이 황망한 가운데 고향에서 따라온 하인이 고향에서 가지고 온 비둘기 한 마리를 끌어안고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비둘기는 흔히 전서구(傳書鳩)라고 해서 편지나 쪽지 등을 날라주는 역할을 하는 동물인데, 시아버지와 남편이 명나라 사절로 떠나는 날 아들의 부인인 평산 신씨가 혹시나 만 리 길이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잘 데리고 가라고 했던 것.

 

그래서 일행 가운데 한 명이 편지를 써서 비둘기에 매달고 날려 보냈는데, 며칠 뒤에 고향집인 예천 호명으로 날아가 마당에 내려앉아 피를 통하고 죽더라는 것이다. 이에 식구들이 열어보니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뜬 비보가 전해져서 평산 신씨가 졸도하였고, 작은아버지인 퇴계도 조카의 비보에 며칠 음식을 끊고 있다가 집안 사람들의 만류로 정신을 차리고 연구하는 주검을 받아 조카의 묘갈명을 써주는 등 장례를 돌봐주었다고 한다.

 

숙부의 애통해 하는 마음이 묘갈명에 담겨 전해온다.​

 

“오 이게 진짜냐 꿈이냐. 이 세상에서 너의 삶이 여기서 그치느냐. 내가 쇠하고 병이 심한데 오히려 살아있고, 너는 방년의 나이에 장강한데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느냐. 역에서 나눈 한 잔 이별주가 북경 수만 리 길이 됐구나.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너는 지금 어디로 갔느냐.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구나. 내가 병이 심해져 7, 8월 사이에 몇 번 죽을 뻔했기에 내가 먼저 하루아침에 이슬이 되어 형님과 네가 돌아오는 것 못 볼까 두려웠는데, 아 슬프구나. 네가 오히려 나를 보러 오지 못할 것이라고 누가 말했겠느냐. 이게 잔종 꿈이냐 생시냐? 너의 삶이 여기에 그치니 하늘 끝 낭떠러지를 바라고 울뿐이다. 오히려 오매불망 너의 돌아옴을 바라던 중 10월 그믐날에 형의 행차가 이르렀는 즉 하루 전 너의 운구가 도착했다. 아 슬프도다. 꿈이냐 생시냐 너의 삶이 여기에 그치다니”......(祭姪將仕郞宓文.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五/祝文 祭文)

 

 

당시 큰아들 복은 처가가 있는 예천 호명에서 살고 있었기에 퇴계는 조카를 어디에 장사지낼 것인가를 고심했으나 남편을 잃은 며느리 신 씨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 처가 쪽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고 조카에 대한 묘갈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당시 24살로 혼인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며느리 평산 신씨는 처가에서 남편을 위해 평생 흰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 등 거친 음식만을 먹으며 남편을 기리다가 일생을 마쳐 남편묘에 합장되었다고 한다. 이런 갸륵한 행실이 나라에 알려져 선조 4년인 1571년에 정려문을 세워 주었고 그 뒤 순조 때 다시 고치고 해서 비각이 남아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운구되고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문중 어른들은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그 멀고 먼 타관에서 며칠 (별세한 날짜와 비둘기가 도착한 날을 계산하여 닷새라고도 함) 동안 죽을힘을 다해 날아와서 비보를 전해준 것이 정말 고맙고 가엽다.” 하여 큰아들 묘소 근처에 자리를 잡아 묻어 주자고 의견이 모아졌단다.

 

그래서 지관이 명당자리라며 묘소 앞쪽에 잡아주어 퇴계가 의로운 비둘기에 대한 비문을 써서 세웠는데 나중에 퇴계 글씨라고 누군가가 들고 가버려 지금은 나중에 만든 작은 한글 비석만이 남아있다. 이 자리가 곧 의롭게 임무를 다한 비둘기 무덤으로 매년 음력 10월 4일에 집안 사람들이 큰아들의 시제를 모시면서 같이 예를 올리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비둘기 무덤이 있는 사연이다.

 

 

어찌 보면 위징 같은 현명한 신하도 충신과 양신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목숨에 대한 애착을 표시한 데서 보듯 인간은 누구나 생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본 충견이나 예천의 비둘기 같은 미물은, 그들이라고 자신의 생명에 대한 의식이나 미련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주인과 맺은 인연에 따른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는 온 힘을 다 써서라도 다한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생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그런 동물처럼 목숨을 꼭 바쳐야 한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우리의 생명을 걸 정도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지향할 각오가 있는지를 이 비둘기 무덤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