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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100년 동안의 폭풍우와 인권의 소중한 값어치

《한 가족의 삶에 드리운 100년 동안의 폭풍우》, 김영란(저자), 김영수(역자)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79]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전 서울법대 문우회 회장인 김영수 시인이 《The long road to the sixth ROK)》라는 책을 뒤쳤습니다. ROK라면 ‘Republic of Korea’의 약자인데, 그러면 제목을 직역하면 ‘제6공화국으로의 기나긴 길’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김 시인은 이를 《한 가족의 삶에 드리운 100년 동안의 폭풍우》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한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자기 아버지가 태어난 1907년 무렵부터 100년 동안 한국 격동의 역사와 그 폭풍우 같은 역사 속을 헤치고 나온 가정사를 버무린 책입니다.

 

책 제목을 저자는 한국이 군사정권을 끝내고 민간정부로 들어선 6공화국까지의 공적 역사에 중점을 두고 정했다고 한다면, 역자는 그 공적 역사에 휘둘린 한 가정의 가정사를 중시하여 제목을 붙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영문책을 뒤친 것이니까, 저자는 일응 외국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저자가 미국 시민권자이니까 외국인이긴 하지만, 저자는 김 시인의 친누님이십니다. 누님인 저자 김영란은 1960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그대로 미국에 눌러앉아 미국 시민이 되신 분입니다.

 

 

책을 읽으면 우리가 잘 아는 한국의 현대사가 펼쳐집니다. 어떨 때는 우리가 잘 아는 역사를 이렇게 자세히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인 독자를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겠네요. 이렇게 역사가 펼쳐지니까, 저자가 역사를 전공했거나 인문과학쪽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자는 이와 전혀 상관없는 세포학과 혈액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평생 이쪽 분야의 연구에 종사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분이 한국 역사에 해박한 것일까요? 저자는 자기가 존경하는 아버지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그때부터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미국 도서관을 뒤지며, 또 미 정부에서 비밀 해제된 자료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참 대단하신 분이네요.

 

저자의 아버지는 불행한 시대를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나라를 잃어 일제 식민치하에서 인생의 좋은 시절을 보내야 했고, 광복 뒤에는 좌우익이 대립하는 혼란 속에서 민족 상쟁(相爭)의 6.25 전쟁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독재정권과 군사정부...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민주정부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책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저자의 가정사를 다 말할 수는 없고, 특히 제 눈에 띄는 부분만 간단히 말해보려 합니다.

 

인간 자체를 사랑하였던 저자의 아버지는 해방 공간에서 좌와 우가 휘두르는 폭력을 혐오하고 오로지 교육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체신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에 학교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납니다. 그런데 이를 수사하는 경찰은 엉뚱하게도 아버지 차의 운전기사 그리고 아버지가 믿고 있던 직원 등 도무지 방화행위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체포해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버지를 체포하여 사흘 동안 고문하며 자백하라고 합니다. 당시 체신학교에는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학생으로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은 학교 수업에는 아무런 뜻이 없이 단지 체신학교의 국비 지원 제도만 이용하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들 때문에 정작 공부하고 싶은 가난한 청년들이 기회를 잃고 있다며 이들 서북청년단원을 제적 조치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보복하기 위해 방화를 하고 이를 아버지에게 덮어씌우려고 하였던 것이지요. 공산주의자인 아버지가 방화한 것이라고요. 말이 안 되는 사건이니 경찰도 결국 다 풀어줬지만, 이후 경찰은 진정한 방화범을 찾으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냄새가 좀 나지요?

 

6. 25 때 저자의 가족들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습니다. 이때 저자의 가족들은 숙명여대 근처의 마당이 넓은 주택에서 살았는데, 집 주위에는 6.25 전에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집을 짓고 살았답니다. 그런데 9. 28. 수복이 되자 이들이 저자의 부모님을 공산주의자로 고발하려고 합니다. 공산치하에서 자기들이 공산군에 협조해놓고는 자기들의 행동을 감추고 정당화하기 위해 저자의 부모님을 공산주의자로 몰려는 것이었지요.

 

정보를 들은 아버지는 저자의 이모집으로 몸을 옮겼으나, 어머니는 체포됩니다. 이리하여 어머니는 생후 1개월 반밖에 안 되는 저자의 동생을 업고 손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갑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끌려가서도 식사 때면 감사 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본 경비원의 보고로 풀려납니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기도를 잊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면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본 것이겠지요.

 

어머니가 풀려나오자마자 저자의 가족들은 안 되겠다 싶어 집을 비우고 아버지한테 갑니다. 그리고 저자의 이모 집 좁은 방 하나에서 서로 몸 부딪치며 이 암울한 시기를 지나가려합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집이 궁금했던 저자가 집에 갔다가 이웃집 여인에게 발견됩니다. 육군 장교의 애인이었던 여자는 아버지의 소재를 물으면서 도망가려는 저자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집 벨을 누릅니다. 그 집은 군 수사기관 고위급 장교가 점거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연락을 받고 출동한 군 수사요원이 저자를 짚차에 태우고 아버지 소재지로 안내하라고 윽박지릅니다.

 

당시 겁에 질린 13살의 어린 저자로서는 이들의 겁박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결국 아버지는 체포되어 남로당원임을 자백하라며 모진 고문을 당합니다. 어떡합니까? 어머니는 아버지를 살려내기 위해 사방으로 뛰다가, 선거 때 아버지가 도와주었던 황성수 국회의원을 찾아갑니다. 이리하여 황성수 의원의 노력으로 아버지는 겨우 풀려납니다.

 

그러나 집은 끝내 도로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당시 안하무인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방첩부대장 김창룡이 저자의 집을 탐한 것이기에 끝내 집은 찾지 못한 것이지요. 김창룡의 악명은 익히 들었는데, 이 책에서도 이를 확인하게 되네요. 김창룡은 결국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을 증오하는 군인들에 의해 암살당하지요?

 

저자는 이때의 진저리치는 기억으로 미국 유학 갔을 때, 기회가 되자 주저 없이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시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책에서 독재권력의 횡포와 이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에서는 2021년 1월 6일 트럼프의 명령에 따른 폭도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미국에서는 큰 거짓말을 믿고 진실을 추구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 거의 40%에 이르고 있다면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임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항상 깨어있으려면 올바른 역사의식에 기초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6. 25 동란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한반도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고 공산주의와 독재가 민중을 짓눌러오는 상황이 다시금 발생해서는 아니 되겠다는 염원 또한 하늘에 닿기에 지난 세월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들을, 그 가운데서도 비밀의 장막에 가려졌던 일들을 파헤쳐 이 책으로 정리해서 남깁니다.

 

그렇습니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값어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해방 공간과 6.25 동란 기간 중 좌와 우에서 벌인 더러운 테러와 공격을 혐오합니다. 그렇기에 이승만 대통령을 숭고한 독립운동가로 존경은 하지만, 그가 일제의 주구로 활약했던 자들을 자기 정권 안위를 위해 고용하고 저지른 독재는 혐오합니다. 책 제목을 민간정부가 들어선 제6공화국까지의 기나긴 길이라고 한 것도,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향하던 지난(至難)했던 길을 보여주기 위했던 것 같습니다.

 

김영수 선배님! 저에게 책을 보내주셔서, 저로 하여금 다시금 인권의 소중한 값어치를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책을 통하여 선배님의 가정사를 알게 되는 귀중한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책을 쓰신 누님께도 고맙다는 말씀 전해주십시오. 책을 보니 선배님의 형제, 자매들은 교육을 우선시한 부모님 덕택으로 모두 자리를 잡고 잘 사시는 것 같더군요. 이제 100년 동안의 폭풍우는 가고 선배님과 선배님 형제자매의 가정에 평안이 영원토록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선배님의 누님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민주주의의 값어치 또한 이 땅에서 영원히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