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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판결은 인문학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섯 판사 이야기》, 양삼승, 나남출판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8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 11년 선배인 양삼승 변호사가 《다섯 판사 이야기》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작년에 《멋진 세상 스키로 활강하다》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 스키장을 돌아보시고 – 심지어는 헬리스키까지 하시고 – 재미있는 스키 이야기를 책으로 내시더니, 이번에는 판사 이야기를 책으로 내셨군요.

 

그런데 책 표지에 ‘양삼승 장편소설’이라고 쓰여있네요. 소설이라고 하니 허구의 이야기가 먼저 연상되나, 실제 판사의 실제 이야기를 쓰신 것입니다. 소설로 쓴 이유에 대해 선배님은 책머리의 ‘작가의 변(辯)’에서 논문에는 감동이 없지만, 이야기에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메마르게 판사 이야기만 사실적으로 쓰기보다는 여기에 소설적 색깔을 더하면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고 감동이 있겠지요.

 

 

책에 나오는 다섯 판사는 양회경, 이영구, 양병호, 양삼승, X. Z. Yang 판사입니다. 제가 읽어보니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는 소설적 색깔만 입혔을 뿐 거의 다 사실로 보입니다. 마지막 X. Z. Yang 판사 이야기만 빼놓고요.

 

양 선배는 X. Z. Yang 판사 이야기는 절반 정도만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앞의 판사들과는 달리 영어로 그것도 이름은 첫머리(이니셜)만 쓴 것이겠네요. 이 이야기는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이 자신의 형사사건에 대해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박시언 씨를 내세워 로비하던 내용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이때 ‘옷로비’가 언론에 밝혀지면서 김 총장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인지 박시언 씨가 검찰에 밉보여 뒷조사를 당하고 재판까지 받지요. 양 선배는 이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쓰신 것인데, 이때 박시언 씨를 변호한 변호사를 Yang 변호사로 하여 소설을 쓰셨습니다. 소설에서는 정의로운 Yang 변호사가 결국 대법관이 되는데, 아마도 Yang 변호사는 양 선배 자신일 것입니다. 양 선배는 아버지 양회경 대법관에 이어 자신도 대법관이 될 꿈이 있었는데, 타의에 의해 법복을 벗은 한을 이 소설에 담은 것 같습니다.

 

양회경 판사는 자유당 독재정권 때도 용기를 가지고 살인죄로 기소된 서민호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1956년 도의원 선거의 부정(정읍 환표사건)을 폭로한 경찰관이 오히려 직무유기, 근무지 이탈, 명예훼손 등으로 기소되었을 때도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관이 된 뒤 1971년 군인의 국가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한 국가배상법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위헌론에 섰다가, 결국 박정희 독재정권에 밉보여 옷을 벗었지요.

 

그리고 이영구 판사는 1976년에 서문여고 선생에 대한 긴급조치 9호 위반(사실 왜곡, 허위사실 유포)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가 옷을 벗었습니다. 당시는 유신정권 시절인데, 서문여고 선생이 수업시간에 북한이 우리보다 1년 먼저 지하철이 생겼다, 후진국일수록 일인정권이 오래 간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것이지요. 요즘 같으면 당연히 무죄인데, 그런 당연한 사건을 그 시절에 무죄 선고하는 것은 판사에게 큰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 판사는 다른 비겁한 판사들과 달리 용기를 내어 무죄를 선고하였다가, 옷을 벗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양병호 판사는 김재규 사건에서 내란음모가 아니라는 소수의견에 섰다가 옷을 벗었습니다. 양병호 판사는 소수의견에 선 다른 대법관과 달리 끝까지 사표 제출을 거부하다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상에나! 대법관이 판결을 잘못하였다고 – 결코 잘못한 것이 아니지만 - 보안사에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하는 끔찍한 일이 불과 40년 전 이야기입니다.

 

원래 국보위에서는 소수의견에 선 대법관들을 사회정화 대상(파렴치범)에 포함해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국보위에 파견 나가 있던 김헌무 부장판사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하는군요. 도대체 대법관을 파렴치범으로 몰려는 신군부의 사고방식이라니!!! 정말 분노로 눈이 아득하기까지 합니다.

 

한편, 양삼승 판사는 당연히 저자 자신인데, 아무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니까 분량도 많습니다. 어찌 보면 짧은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양 선배는 1987년에 고교동기인 조영래 변호사에게 김용철 대법원장 연임 반대 글을 써달라고 찾아갔다가, 마침 조 변호사가 자리에 없어 그 사무실 전화로 조 변호사와 통화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가 도청되어, 다음날 양 선배는 법원의 상급자로부터 다른 생각 말고 업무에나 열중하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이 얘기하니까 저도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부산지방법원에 근무하였는데, 부산지방법원에서도 판사들이 대법원장 연임을 반대하는 서명을 하였습니다. 서명하는 판사들이 많다 보니 서명지는 여러 장이 되었지요. 저도 서명을 하려고 서명지를 받아드니 맨 아래쪽 공간만 남아, 거기에 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문에서 이를 보도하면서 서명한 판사들 명단을 실었는데, 제가 서명한 서명지가 맨 마지막으로 가게 되어, 결국 제 이름이 맨 마지막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본 주위 사람들 중 제가 서명하기 싫은데, 동료들 눈치 때문에 할 수 없이 맨 마지막에 서명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리고 양 선배는 1988년에는 “사법권은 계속 잠식당해야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법률신문에 기고하였다가, 법원장으로부터 호된 야단을 맞습니다. 법원장은 양 선배가 재판 중임에도 호출하여 당장 원고를 철회하라고 하였는데, 이미 지방판에 이 원고가 실렸기에 되돌릴 수가 없었지요. 이때 양 선배는 분하고 슬픈 마음에 법원장실에서 나와 화장실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였답니다.

 

또한 1992년에는 검사가 10년 이상 구형하였을 때는 집행유예나 무죄를 선고하더라도 피고인을 석방하지 못한다는 규정(형사소송법 제331조)에 대해 위헌제청을 하여 헌법재판소의 위헌을 끌어냈지요. 결국 양 선배는 1999년 대전법조비리 사건 때 평소 양 선배를 밉게 본 검찰의 언론플레이로 옷을 벗습니다.

 

대전법조비리 때 양 선배는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였는데, 대전법조비리의 주역인 이종기 변호사가 고교후배였습니다. 어느 지역이나 다 동문회 활동이 있지 않습니까? 대전 지역에도 고교 법조인 모임이 있었는데, 양 선배가 제일 선배라 당연히 회장을 맡았습니다. 이때 이종기 변호사가 모임 때 회식비로 쓰라고 양 선배에게 돈을 준 것이지요. 당시만 하여도 이런 게 관행이어서 양 선배는 따로 통장에 회식비를 보관하였다가 지출하였지요.

 

그런데 대전법조비리에 대해 수사가 들어가면서 이 통장에 이종기 변호사의 수표가 입금된 것이 나온 것입니다. 통장에는 80만 원이 들어있었는데, 양 선배는 동창회를 위한 돈이라 아무 거리낌 없이 이 변호사에게 받은 수표를 여기에 넣어둔 것입니다. 수사하던 검찰은 이것만으로는 형사 처벌할 수 없으니, 망신을 주자는 생각에 언론에 흘렸습니다. 당시 대전법조비리, 의정부법조비리로 떠들썩할 때라 기자들은 대법원장 비서실장이 – 문제 될 당시 직책 – 돈을 받았다는 것이 훌륭한 요릿감이라 생각하고 그 실체도 들여다보지 않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결국 고결한 양 선배는 이를 참지 못하고 옷을 벗은 것이지요.

 

그런 회한이 있었기에 양 선배는 다섯 판사 마지막을 X. Z. Yang 판사라는 이름으로 하여 쓰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양 선배는 위와 같은 법조활동 사실에 양회경 판사가 공부를 하고 싶어 일본에 밀항한 이야기, 이병구 판사가 독일 문학, 특히 괴테에게 미쳐 봉급 대부분을 여기에 쓰던 이야기, 양병호 판사가 1970년 설악산 등산 도중 죽을 뻔한 이야기 등을 맛깔스럽게 넣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들도 다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X. Z. Yang 판사가 대법관 청문회 자리에서 얘기하는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서 《다섯 판사 이야기》를 본 소감을 마칩니다.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 왔고 성찰해 온 결론은 결국 우리나라 판결에 담긴 ‘정의의 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의의 질은 결국 두 가지 요소인 정의의 ‘밀도’와 ‘순도’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먼저 ‘정의의 밀도’는 결국 법원의 판결이 형식적인 법률해석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얼마나 ‘인생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는가’에 따라 정해질 것입니다.

 

곧, 판결이 법을 뛰어넘어 인문학 안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탁월성이 인정됩니다. 법은 과학의 영역일 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법학은 법률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법률가는 법적 지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인간사의 얽히고설킨 실타래에 법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정의의 밀도가 높은 경우에, 이를 보통 ‘시(詩)적 정의’ 또는 ‘문학적 정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진정한 시적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비문학적 장치들, 곧 전통적 법률지식, 법의 역사와 판례에 대한 이해, 법적 공평성에 대한 확고한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적 정의에 대한 소양을 기르기 위해서는 판사 스스로 체험을 통하거나, 아니면 역사, 문학, 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판사들의 성실한 노력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다음, ‘정의의 순도’는 결국 법적인 정의가 바람직하지 못한 외부적 요소들, 대표적으로 ‘정치적 힘’이나, ‘경제적 힘’에 의해서 왜곡되지 않고 그 순수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정치권력이 외부(북한)의 안보 위협이나 사회적 불안을 내세워 법적 정의의 양보를 강요하거나, 아니면 재벌기업 총수들의 부조리에 대하여 경제발전을 내세워 부당한 선처를 요구하는 경우가 그 예입니다. 물론, 그 변소가 합리성 없이 자의적이라고 여겨지면, 그 순간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회과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러한 ‘순도’를 숫자로 계량화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자라나는 후배 법조인들이 이 점에 관한 연구와 노력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곧 사법부는 총체적인 정의의 순도를 극대화하고자 하지만, 정치권력 또는 경제권력이라는 제약조건에 의해 순도의 극대화가 제약받는다고 가정하면, 그러한 제약조건 아래서 ‘정의의 순도를 극대화’하는 문제를 ‘최적화 방법론’을 활용(미적분학의 응용)하여 계량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