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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감히 구로회를 꿈꾸며

도반(道伴)이 험한 세상을 함께 하는 것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51]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장자(莊子)가 길을 가다가 물이 말라버린 연못을 지나게 되었다. 메마른 연못 바닥에는 물을 잃은 물고기들이 퍼덕거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자는 문득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물이 빠지는 연못에 있다가 같이 곤경에 처한 것인데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입으로 거품을 내뿜어 서로의 피부를 촉촉이 적셔주며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유이말(相濡以沫)’이란 말이 나왔다. (濡유=적시다. 沫말= 물방울, 거품) 죽음에 이를 어려운 상황에서도 먼저 남을 생각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그를 위한다는 뜻이다. 줄여서 濡沫(유말)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부가」라는 시조로 잘 알려진 중종 때의 문신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조선조의 수많은 문신(文臣)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산 분으로 유명한데, 고향 안동 낙동강 가 분천(汾川)에 내려와 살면서, 관직이라는 것이 늘 사람들의 기를 빼앗고 결국엔 삶까지 뺏어가는 것이 장자가 말한 물고기 신세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를 분어행(盆魚行)이라는 자유시로 그 심회를 펴낸다. 어항 속의 물고기 신세를 묘사한다는 뜻이다.

 

 

 

童稚悶寂寥 아이들이 무료함을 답답히 여겨

罩取魚兒至 그물로 작은 물고기 잡아왔는데

纖鱗四五箇 어린 물고기 네댓 마리가

喁噞憐憔悴 입만 오물오물 초췌하여 가련하네​

 

斗水儲瓦盆 질그릇 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放之而爲戲 풀어놓고 장난꺼리로 삼았네

始舍圉圉然 처음 놓아주자 비실거리더니

漸蘇如起醉 술에서 깨듯이 점점 살아나더니 ​

 

俄然作隊行 이윽고 떼를 지어 다니며

交頭疑湊餌 머리 맞대고 먹이를 먹는 시늉을 하고

撥剌或欲飛 활기차게 뛰어오르기도 하고

盆中游自恣 어항 속에서 마음껏 헤엄치네 ​

 

然非得其所 하지만 제 살 곳이 아니기에

爾生還可瘁 네 삶이 도리어 피폐하겠지

方此大旱餘 지금 한창 큰 가뭄 나머지

川澤皆枯匱 내와 못이 모두 다 말랐고

 

盆水朝夕渴 ​동이의 물도 아침저녁으로 마르니

糜爛安可避 썩어 문드러짐을 어찌 피하랴

呴沫以爲恩 서로 돌봐주어 은혜로 여기지만

不思終委棄 마침내 버려짐을 생각하지 못하네

 

                                                   ... (김언종 역)​

 

저 물고기들이 잡혀 와서 어항 속에서 놀고 있지만 원래 살던 곳은 가뭄이 심해 물이 다 말랐으니 거기 있는 물고기들은 다 말라 죽을 운명인데, 비록 지금 어항 속에서 놀고 있는 저 물고기들도 결국엔 말라죽거나 버려질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뜻이다. 이 시 원문에 들어있는 '구말(呴沫)'이란 표현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상유이말과 같은 말이다. 呴噓濡沫(구허유말)이란 표현의 준말이다.

 

구허(呴噓)는 몸속의 공기를 내뿜고 새로운 공기를 마시는 호흡을 말하는 것인 만큼 이렇게 숨을 헐떡이며 숨이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거품을 내어 상대의 몸을 축여주지만, 곧 죽을 운명인 것은 차이가 없는 신세임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이 시는 농암이 써서 자기 친한 친구 송재 이우의 조카인 퇴계 이황(1501~1570)과 그의 형 온계 이해(1496~1550)에게 준 시로서, 일찍 벼슬살이의 운명이란 것이 이처럼 한심하고 처절한 것이니, 이 시를 잘 읽어 보고 벼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경북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1,106m)의 동쪽 계곡에 평천이란 동네가 있다. 주흘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내를 이루어 평평한 땅 동쪽으로 가로질러 흐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1977년 2월에 동네에 사시는 일흔이 넘은 노인 9분이 '구로계(九老契)라는 계(契)를 결성했다. 나이도 비슷하고 학문도 비슷해 서로 뜻이 맞는 친구들이 앞으로 서로 끈끈한 유대로 잘 지내면서 이 귀한 모임이 자손들까지 길게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그러한 뜻에서 각자가 시를 써서 한군데에 모아 《구로계시첩》이란 작은 책자로 태어났다.

 

 

이 시첩의 머리말에도 장자의 물고기 비유가 등장한다.​

 

“세상이 어려운 때를 만났도다. 오가며 서로 사귀어온 우리가 마땅히 살 만한 곳이 없었기에, 산과 더불어 물을 찾아 와, 동네가 깊고 푸르므로 손짓해 서로 모여 차례로 앉은 이가 9인(九人)이니. 젊은이로부터 머리 흰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숨을 내쉬며 물방울에 적신다면 의중(意中)을 서로 얻어 또한 흡족할 것이다.”​

 

젊은이로부터 늙은이까지 숨을 내쉰다는 부분의 원 한문은 "自靑陽至老白首 呴噓濡沫(구허유말)則 意中相得亦可足矣"라고 해서, '구허유말'을 썼으니, 서로 어려울 때 힘껏 도와주면 그 보람이 클 것이란 말이다.

 

구로회라는 것은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 ~ 846)로부터 비롯되었다. 백거이는 흔히 백낙천(白樂天)으로 알려져서 낙천이 호(號)인줄 알지만, 낙천은 자(字)이고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다. 그는 800년 29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최연소 급제한 뒤 842년에 형부(刑部) 상서(尙書)를 끝으로 은퇴하여 고향인 향산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이때 백거이는 노인 친구 8명을 초대하여 주연(酒宴)과 시회(詩會)를 가졌는데 후세인들은 이 모임을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라고 부르며 덕망 있는 노인들의 모임을 이르는 대명사로 사용하였다.

 

농암 이현보도 중종 28년(1533)에 그의 아버지 이흠을 위로하기 위해 동네의 노인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수연(壽筵)을 열었는데, 이 모임을 계기로 구로회라는 모임을 시작한다. 농암의 표현을 빌리면​

 

“예로부터 우리 고향은 늙은이가 많았다고 했다. 1533년 가을 내가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 내려와 부모님을 뵙고(省親) 수연을 베푸니 이때 선친의 연세가 94살이었다. 내가 전날 부모님이 모두 계실 때 이웃을 초대하여 술잔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만 계시는지라 잡빈(雜賓)은 빼고 다만 마을에 아버지와 동년배인 80살 이상의 노인을 초대하니 무릇 여덟 사람이었다. 마침 향산 고사에 ‘구로회(九老會)’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날의 백발노인들이 서로서로 옷깃과 소매가 이어지고, 간혹 구부리고 간혹 앉아 있고 편한 대로 하니 진실로 기이한 모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연유로 구로회를 열고 자제들에게 이 사실을 적게 하였다.”​

 

라고 하여 백낙천의 향산구로회를 이어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부모님이 살아 계신 하루하루를 아낀다’라는 뜻으로 애일당(愛日堂)을 지어 잔치를 해드렸기에 때로는 이 구로회를 애일당 구로회, 혹은 고향의 강 이름을 따서 분양(汾陽)구로회라고 불렀다.

 

고향 평천의 구로회 회원으로는 마을에서 한문을 제일 잘하셨다는 신태영 공을 비롯해 진성인, 곧 진성 이 씨가 네 분인데 병(炳)자 숙(淑)자를 쓰시는 분이 곧 필자의 조부시다. 진성 이 씨 네 분은 파(派)는 같지 않지만 갈평과 평천에 흩어져 사셨는데 특히나 갈평은 진성 이씨의 시조인 이석(李碩)의 아들로 고려 말에 급제하여,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라는 관직에 오르면서 통헌대부(通憲大夫)의 품계에 이르고 공민왕 때에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진 이자수(李子脩) 공이 잠시 터를 잡고 사시려던 곳이어서, 후손들이 경송정(景松亭)을 세워 그 덕을 기리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진성 이 씨 후손들이 많이 살았다.

 

 

2022년 5월 말 평생 퇴계를 연구하신 이광호 전 연세대 교수(현 국제퇴계학연구회장)와 이한방 전 경북대 교수, 낙동강의 역사와 인문지리를 연구하시는 오상수 원장님,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전 회장인 이선기 님, 퇴계학연구원 전 사무총장 이중환, 어정쩡한 글쟁이인 필자 등 문경 출신의 6명(이한방 님은 예천 출신)이 다 함께 차를 타고 문경 일대의 주요 유적지와 경승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문경읍의 평천리 출신이고 함께 하신 이광호 교수님은 문경읍 갈평리 경송정 근처 출신이시다. 이번에 같이 가본 고향은 예전 어릴 때와 완전히 달라져 길이 새로 나고 집들도 새로 고친 곳이 많지만 가장 큰 변화는 숨을 내쉬어 물방울을 적시어 주기로 약속하신 그때의 노인들이 다 세상을 뜨고 이제는 한학을 하시는 분들이 거의 남지 않아 예전 구로회분들의 생각이나 활동도 더듬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분들이 산수 좋은 이곳 평천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 서로 학문을 함께 익히고 매일의 생활에서 바른 도를 실천하며 살아오셨고 그러한 삶의 목표를 구로계 시첩에 남겨놓으셨는데, 이제 그 전통도 다 끊어질 운명이라는 점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우리만 해도 공부를 한다고 다 고향을 등지고 서울 등 대도시로 나와서 살다 보니 고향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던가?

 

일찍이 필자의 조부이신 병숙 공은 구로회원들의 시 잔치에서 이런 시를 남기셨다.​

 

滿七二加知己翁 만 72살에 친구를 더한 노인네가

疎狂多愧亦叢中 일상에 치어 후회로운 생활에 바쁜 가운데

交情渾是泉流澹 벗들과 함께 나누는 정은 냇물처럼 맑고

奇氣高如嶽勢雄 우정의 기세가 웅장한 산과 같네

隨柳前川春色暗 앞 내에 버들가지 봄기운 짙어가는데

訪花古洞夕陽紅 꽃 찾아온 이 골짜기 석양빛이 붉구나

更寧諸胤追先契 우리 친구들 선조를 따라 다시 계를 맺으니

世好新新屹美東 세세손손 이 주흘 동쪽에서 아름답게 피우자꾸나...

 

그렇게 우리 할아버지들이 사시던 고향을 다녀본 우리는 고향이 더욱 그리워지고 그곳에서 세상의 험한 풍파를 떠나서 농암이나 퇴계처럼 맑고 밝은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현실에서는 고향으로 내려가 살기가 쉽지 않고 그렇게 모여 살기도 불가능하다.

 

이번에 우리 일행이 문경을 답사하며 문경의 땅과 역사와 인물들을 알아보는 답사여행을 한 것도 사실은 고향을 떠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여행으로 우리는 ‘고향이라는 것이 역시 좋구나, 거기에 조상 어른들이 좋은 분들을 친구로 삼아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아오셨구나,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친구들 사이에 입으로 거품을 품어 그 마른 몸을 적셔주듯이 도와가며 살아오셨구나...’ 하는 것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때 모인 분들은 젊을 때 각자의 길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오셔서 그나마 이런 성취라도 얻으신 분들인데,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렇게 가끔 만나는 여행 기회를 마련하는 게 좋다는 공감을 가졌다. 그보다는 어쩌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요즈음에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시대이니 각자가 사는 곳에 국한되지 말고 공간에서 서로 만나 마음과 학식과 인정을 나누고 그것으로써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말하자면 고향에서의 구로회 회원이 되기 어려우면 사이버에서 만나 서로 구로회원이 되는 것이다.

 

다들 70이 넘어가니 구로회원의 기본 자격은 되는 만큼 마음이 맞는 분 몇 분이 더 참여하면 충분히 구로회를 결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문경이라는 지명의 예 이름인 관문(冠文)혹은 우리가 급조한 사이버 단체방 이름인 문진(聞眞, 문경에서 만난 진성이씨라는 뜻일 수도 있고 진정한 길을 물어 찾아가는 사람들이란 뜻도 될 것이다) 이란 이름을 붙여 관문구로회, 혹은 문진구로회를 만들어 추진하면, 고향을 같이 하고 뜻도 같이하는 도반(道伴)이 험한 세상을 함께 하는 것이 되니 그 얼마나 이번 여행의 의미가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