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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각오하고 마치 다이빙하듯이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 부정에 대한 반박 '시' (1)
오노 도자부로 '시',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해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한국정부는 일제에 강제 동원되었던 할머니의 배상금을 자국기업의 돈으로 지불하겠다는 해법을 내놓았고, 사흘 뒤 일본외상은 ‘강제노동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미 지난해 여름 일본 후생성은 할머니의 통장에 친절(?)하게도 후생성 탈퇴연금 ‘99엔’을 송금했었다. 공부시켜준다고 속이다가 마침내 협박당하여 어쩔 수 없이 일본의 군수공장에서 일해야만 했던 양금덕 어린 소녀는 잠 못 자고 굶주리며 일해야만 했다. 고통은 그때만으로 끝나지 않고 결혼생활에 멍에가 되어 여성으로서 지독히도 불행하게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한국정부의 해법에도 일본외상의 주장에도 침략시대를 살아냈던 어린 소녀는 안중에 없었다.

 

일본의 평론가이자 시인이며 전 메이지학원대학(明治學院大學)에서 일본근대문학을 가르쳤던 미츠다 이쿠오(満田郁夫:1937~)교수는 일본의 아나키즘 운동을 했던 오노 도자부로(小野十三郎:1903~1996)가 쓴 시집에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에 대한 시 15편을 찾아내어 한국의 잡지 《착각의 시학, 24호, 2019, 봄)》 에 소개한 바 있다.

 

오노 씨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외국인 노동자가 묵는 숙소에서 감독관을 지냈으며 대표적인 시집 《대해변(大海邊)》(弘文社, 1947)에 징용조선인 이야기를 시로 남기고 있다. 이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을 다룬 흔치 않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이야말로 최근 일본 외무상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가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해 결코 ‘강제노동이 아니다’라고 한 말을 무색하게 해준다.

 

오노 씨의 작품 가운데 두 편을 골라 미츠다 이쿠오(満田郁夫) 교수의 해설과 더불어 한국인 독자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미츠다 이쿠오 교수 자신이 어린 시절에 본 강제노동 조선인 이야기도 소개하겠다. 더 나아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가 땅굴에서 숨어 14년을 지내야 했던 징용중국인을 노래한 시도 소개함으로써 당시 일제가 조선인을 비롯한 중국인들의 강제 동원 사실을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리고자한다.

 

                                 탈주자

                                                            - 오노 도자부로

 

부산을 향해 / 달려가는 열차의 / 변소 유리창을 두드려 깨부숴

죽음을 각오하고 / 마치 다이빙하듯이 / 오직 한 가지

일본 본토 땅을 밟지 않기만을 / 바랐던 자도 있었다더라


 

 

이는 오노 도자부로 씨의 징용조선인에 대한 노래로 《대해변(大海邊)》 조선인(6)에 실려 있다.  이 시는 심야 열차 안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나눈 짧은 대화 가운데 한토막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곳곳에서 부산항으로 모여든 조선인들, 그들은 관부연락선(関釜連絡船,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드나드는 배)에 짐짝처럼 태워져 큐슈의 치쿠호 탄광 등으로 보내졌다.

 

오노 씨는 전시(戰時)에 동원되어, 일본 오사카의 군수공장으로 끌려온 조선인 숙소의 지도원으로 일했다. 끌려온 조선인들을 시모노세키에 가서 데려 와 관리, 감독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대부분 일본인 관리인들이 악독하게 굴었다고 알고 있지만 오노 씨는 일본제국주의를 계급투쟁으로 전복해야한다는 사상을 가진 프롤레타리아 시인이었다. 

 

오노 씨는 계급투쟁으로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려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똑같은 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에게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미츠다 교수는 “이 시는 심야의 기차 안에서 나눈 얼마 안 되는 대화 중 하나다. 시인이 조선의 젊은이 가운데 하나로부터 듣게 된 이야기로, 그들이 일본에 건너올 때 있었던 사건일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츠다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젊은이 중 하나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패전에 의해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 시인과 그들 사이가 피지도원과 지도원의 관계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 혹은 시인도 지도원의 직을 그만둔 상태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전송한 것, 그로 인해 그들 사이에 친교가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미츠다교수는"죽음을 각오하고 마치 다이빙하듯이/ 오직 한 가지 일본본토 땅을 밟지 않기만을/ 바랬던 자도 있었다는 부분을 여러번 읽었지만 그때마다 오싹해진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2018.9.17. 미츠다 이쿠오) 제2회로 이어짐

 

 

                                                   

*류리수 박사의 일본어 번역 《백범일지》 기사 보러가기

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17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