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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다 교수가 본 '조선인 농경대(農耕隊) 강제노동'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 부정에 대한 반박 글 (3)
맛있는 일본이야기 < 684 >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후쿠시마현에 있는 우리 개간지에 찾아온 조선인 농경대(農耕隊)들은、오키나와 1호라든지 오키나와 2호라는 고구마를 심었다. 이 고구마는 아주 크게 자라는 품종으로 식용이 아니라 비행기의 연료인 가솔린이 귀해져서 가솔린 대용의 알코올을 얻기 위한 고구마 재배에 돌입했던 것이다. 2차대전 말기, 일제는 연료를 위해 소나무 송진을 모으거나 심지어는 고구마까지 활용했다.

 

고구마 가솔린을 연료로 한 그 비행기에는 특별공격대원 (가미카제 특공대)인 젊은이가 타는데 편도만 탈 수 있는 연료만 넣고, 돌아올 연료통에는 폭탄으로 채워 적군을 비행기채로 공격하게 하는 전술을 썼다. 오노 도자부로(小野十三郎)의 시 「항공기용 알코올에 대하여」에서 말하는 ‘큐슈 남단에서 돌아온 친구들’은 특공대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전후(戰後) 사람들은 그 알코올을 몰래 빼돌려 술로 되팔았다.

 

 

우리 개간지에 찾아온 조선인 농경대는 너무나 불쌍한 모습이었다. 종잇장처럼 얇은 군복을 입고 거친 땅을 개간해서 고구마를 심을 수 있는 밭으로 만드는 중노동을 강요받았다. 그러면서도 음식은 충분하지 않아서 계속 배를 곯으며 “뭐든 먹을 것 좀 주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현지 일본 개간지의 주민들 조차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집을 찾아오곤 했다. 상황이 그러할 진대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했겠는가? 하지만 우리 집도 1944년 3월에 그곳으로 이주해 들어왔기 때문에 아직 작물을 심어 거둘 시간이 충분치 않아 춘궁기를 비참하게 보내야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때때로 식구들의 먹을 것을 조금 떼어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조선인들은 우리가 다니는 학교에서 먹고 잤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자리를 빽빽하게 앉게 하고 교실 몇 개를 비워서 그들을 묵게 했다. 몇 명의 일본인 하사관이 그들을 감시하며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 하사관은 다다미가 깔린 재봉교실에 묵으며 식사도 별도로 하고 있었다. 일본 군대의 특징인 폭력제도는 이곳에서도 행해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하룻밤 사이에 이 부대는 소멸되었고 이곳 소속의 조선인들은 도망쳐버렸다. 그들은 무사히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돌아간 뒤 조선인 농경대가 머물렀던 우리는 교실을 대청소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청소가 아니었다. 미츠다 이쿠오 교수는 당시를 회상했다. 조선인들이 도망칠까봐 그들을 관리하는 하사관들은 밤에 열쇠를 밖에서 잠그고 그들을 가두는 바람에 변소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조선인들은 잠자리에서 똥오줌을 쌀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낡은 못으로 나무판과 나무판 틈새를 후벼 파고, 새끼줄을 묶어 만든 솔로 박박 문질렀지만 코를 찌르는 악취가 언제까지고 빠지지 않았다.      (2018.9.10. 미츠다 이쿠오)

 

그곳에 수용된 조선인들이 너무 많아 비좁아진 교실인데다 변소에도 드나들지 못하고 똥오줌 속에서 견뎌야 했던 조선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오랫동안 똥냄새가 빠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 미츠다 교수는, 일본 제국주의가 전쟁의 광기 속에서 조선인 농경대를 강제 동원하여 추위, 혹독한 노동, 폭력, 굶주림 속에서 짐승과 같이 취급했음을 알렸다.

 

 

<참고>  농경대(農耕隊)에 대하여

 

농경대(農耕隊)라는 용어가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정혜경 박사의 「일제말기 조선인 군노무자의 실태 및 귀환」 (2003)에 따르면 1943년 7월 20일 국민징용령을 개정한 이후 강권적으로 다수의 군노무자를 동원했다고 한다. 그들은 전방에서 포로수용소 감시원, 군비행장, 철도 건설 등의 일을 했고 후방에서도 본토(일본) 결전을 위한 각종 시설물 공사에 동원되었다. 츠카사키 마사유키(塚崎昌之)는 일본에 특설대나 농경대로 파견된 군노무자는 노동력 착취뿐 아니라 본토 결전시 마지막 총알받이를 목적으로 동원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아메미야 츠요시(雨宮剛) 교수는 퇴직한 뒤 5년 동안 고향 아이치현을 비롯하여 전국 30여 곳에서 50~60명의 증언을 모아 『또 하나의 강제연행 수수께끼의 농경근무대』(2012)라는 증언집을 자비출판했다. 농경대는 일본 내각회의에서 결정하여 1945년 2월 조직된 일본 육군의 식량증산부대로, 14~20살의 어린 조선인 1~2만 명을 일본 각지로 끌고 와서 황무지를 개척하게 하고 재배한 고구마로 항공기용 기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혜경 박사도 농경대는 군인의 감시와 구타를 받았으며 파견 당시의 임금조건, 근무기한이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고 식량부족의 고통이 가장 심했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