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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퇴계가 쓴 묘갈이 파주에 있구나

공부의 목적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96]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퇴계 친필로 된 묘갈문 비석이 있어요”

파주 쪽 아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퇴계는 경북 안동 사람이어서 고향 쪽에는 많은 글씨를 남기셨지만, 퇴계의 친필 묘갈문이 파주땅에 비석으로 있다니. 부쩍 궁금증이 일어나서 어디에 있냐고 하니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단다. “거기에 왜 있지요?” 하고 다시 물으니, “아 묘갈이 있는 곳은 성수침이란 분의 묘소이고, 그분은 성혼의 아버지인데 그 옆에 나란히 묘소가 있어요”라고 한다. 성혼(成渾)이라면 호를 우계(牛溪)라고 하는 유명한 성리학자이신데 그 아버지가 성수침(成守琛)이구나. 그런데 거기에 퇴계가 쓴 친필 묘갈이 비석으로 있단 말인가? 곧 가서 보자고 하니 저녁 무렵에 안내를 해준다.

 

 

과연, 향양리라는 곳, 약간의 야산을 끼고 언덕을 따라서 조성된 꽤 넓은 묘역에 들어가니 비각이 눈에 들어온다. 비각 안에는 사람 키보다 큰 두 개의 비석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성혼의 신도비(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길가에 세우던 비석)고, 왼쪽의 것이 성수침 선생의 묘갈비이다. 팔작지붕형의 가첨석(加檐石, 빗돌 위에 덮어 얹는 지붕 모양으로 된 돌), 비신(碑身), 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 높이 230㎝, 비 높이 130㎝, 너비 67㎝, 두께 22㎝로 재료는 대리석이고 비좌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비 정면 맨 위에 청송성선생묘갈명(聽松成先生墓碣銘)이라고 전서(篆書)로 쓰여 있어 이게 그 묘갈이 맞구나. 본문은 글씨가 작아서 제대로 보기는 쉽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읽을 수는 있겠다. ​

 

묘갈 본문은 단아한 필치로 이렇게 시작한다.​

 

嘉靖四十有三年正月己亥聽松成先生病卒于坡州之牛溪享年七十二

가정(嘉靖) 43년(1564, 명종19) 1월 기해일에 청송(聽松) 성 선생이 병으로 파주 우계(牛溪)에서 세사을 떴으니 향년이 72살이었다.​

 

그리고는 당시 조정에서 장구(葬具, 장례에 쓰는 기구)를 내려받아 4월 계유일에 파주 향양리(向陽里) 선영 곁에 장사하였는데 그 맏아들 혼(渾)이 이이(李珥)가 지은 행장(사람이 죽은 뒤 그 평생에 지낸 일을 기록한 글)을 가지고 나(이황)에게 명문(銘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황은 감히 감당하지 못하나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였다고 그 경위를 밝히고 있다. 묘갈은 이어 성수침의 가계와 출생, 성장과정을 서술하고 그가 학자로서 어떻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학문에 매진했는지를 정리해주고 있다.

 

 

퇴계는 1557년에 안동 도산에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해 1561년에 완공하고는 주로 거기에 머물며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다가 1570년에 돌아가셨는데, 퇴계가 평소 주위에 건물 이름이나 당호 등을 써 준 것은 많이 남아있지만, 이 파주 땅에 그의 묘갈 글씨가 남아 그것도 돌에 새겨 전하는 것은 꽤 특별한 일인 것 같다. 더구나 친필 묘갈은 안동 쪽에도 몇 점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친필이 돌에 새겨져 있다니... 그런 궁금증에 답을 주듯 뒷면을 보니 거기에 다른 글이 있다. 곧 비석 앞면에 퇴계의 친필 글씨를 새겼는데 글씨 크기가 작아서 잘 보기가 힘들어, 그 경위를 설명하는 글을 새겨놓은 것이다. 그 내용을 보니 ​

 

“아, 이것은 바로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선생의 묘갈이다. 처음에 성대곡(成大谷-성운, 成運)이 유사(遺事, 죽은 사람이 남긴 사적)를 기록했고, 기고봉(奇高峯-기대승, 奇大升)이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ㆍ신분ㆍ행적ㆍ자손의 이름 등을 기록한 글)를 지었고, 율곡(栗谷-이이, 李珥) 이선생(李先生)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이 묘갈은 퇴계(退溪=이황(李滉)) 이선생(李先生)이 지은 것이다. 사자(嗣子, 대를 이을 아들)인 우계(牛溪-성혼, 成渾) 선생이 장차 새겨서 세우려고 하다가 난리를 만난 탓으로 이루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근래에 사류(士類, 학덕이 높은 선비의 무리)가 세월이 오래 흘러 끝내 폐해질까 염려하고는 서로 힘을 보태어 비석에 새기기로 상의하였는데, 사방의 선비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도운 자들이 많아서 마침내 일을 끝냈다. 글씨는 퇴계가 지은 초본(草本)의 글씨가 다행히 남아있기에 그것을 썼고, 전서(篆書) 글씨는 상국(相國) 김상용(金尙容)의 유필(遺筆, 죽은 사람이 생전에 써서 남겨 놓은 글씨)을 집자(集字)했다.” ​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퇴계가 써 보낸 성수침에 대한 묘갈을 그의 아들 성혼이 받아서 돌에 새겨놓으려다 전란을 맞아하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나중에 후손과 선비들이 퇴계의 친필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를 비석에 새겼다는 내용이다. 본문은 퇴계의 글씨요, 그 위에 전서(篆書)로 쓴 비의 제목은 김상용(金尙容)의 유필 가운데에서 글자를 골라서 쓴 것임을 알겠다. 김상용(1561~1637)은 인조반정 후에 예조ㆍ이조의 판서를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한 분인데 생전에 글씨에 뛰어났었다. ​

 

이 내용을 기록한 사람은 포저(浦渚) 조익(趙翼)이란 사람으로, 선조 12년인 1589년에 태어나 효종임금 6년인 1655년까지 살았으며, 대사간ㆍ이조참판ㆍ대사성ㆍ예조판서ㆍ대사헌ㆍ공조판서ㆍ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대동법(大同法)을 확대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고, 경학ㆍ병법ㆍ복술(점을 치는 법)에도 뛰어나 장유(張維)ㆍ최명길(崔鳴吉)ㆍ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사우(四友)’라 불린 유명한 문사였다. 그러므로 이 묘갈이 돌에 새겨진 것은 조익이 살던 시대로서,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1648년 충주에서 채석한 돌로 우선 1649년에 먼저 우계 성혼의 신도비(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길가에 세우던 비석)를 세우고 2년 뒤 1651년에 그 옆에 청송의 묘갈을 새겨 세운 것으로 나온다. ​

 

그러면 퇴계는 이 묘갈을 왜 언제 써서 보냈을까?​

우선 성수침(成守琛)이 누구인가부터 알아보자.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이니 이참에 공부 좀 하자.​

 

성수침은 1493년(성종 24) 서울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한성부윤 성득식(成得識), 할아버지는 현령 성충달(成忠達), 아버지는 대사헌 성세순(成世純), 어머니는 강화부사 김극니의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어른처럼 의젓해 ‘효아(孝兒)’라 불렸다. 22살이 되던 1514년 부친상을 당하면서 파주 향양리에 내려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동생 성수종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지치(至治, 세상이 잘 다스려진 정치)를 통한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꿈꾸며 학문을 익혔지만 1519년 기묘사화로 스승과 많은 선비가 몸을 망치는 일을 보고는 벼슬에 올라 백성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북악산으로 들어가 ‘청송당(聽松堂)’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매일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그의 자세가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들을 등용하는 제도인 유일(遺逸)로 여러 번 관직을 천거했지만, 번번이 사양했다.

 

그러다 자신의 신념에 따른다고 해도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 불충(不忠)이 된다며 모친을 모시고 서울을 떠서 1544년 처가가 있는 파주 땅 우계(牛溪)라는 곳에 ‘죽우당(竹雨堂)’을 짓고 은둔하였다. 성수침은 이곳에서 항상 《소학(小學)》을 사람들에게 권하며, "수신(修身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음)의 대강이 모두 이 책에 있다. 이 글을 읽지 않으면 집에서 어떻게 어버이를 섬기며 조정에 나아가서는 어떻게 임금을 섬기겠는가?" 하였다. 성수침의 스승인 조광조가 ‘소학동자’라 불리던 김굉필의 제자였던 점과 상통하는 가르침이다.​

 

그는 일상생활이 늘 검소했고 친척 가운데 곤궁한 자가 있으면 재산을 기울여서 구원해 주었고 벗과 형제들에게 노비까지 나누어 주면서도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남이 선(善)한 일을 했다고 들으면 감탄하고 사모하며 잊지 않았고, 남의 과실을 보면 곧바로 배척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뜻만 보여 자신이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고 한다. 언어나 일 처리에 있어 모나거나 거칠게 하지 않았지만, 의리(義理)로 결단할 때는 지극히 엄격하였는데 마침내 1564년 7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 향양리 선영에 묻혔으니 지금 묘소가 바로 그곳이다.

 

성수침은 퇴계보다는 8년 먼저 세상에 나온 것이고, 조광조의 제자였던 만큼 퇴계는 누구보다도 성수침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가 내려진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고향인 파주에서 자기를 수양하며 평생 산림처사(山林處士, 세속을 떠나 산골에 파묻혀 글이나 읽고 지내는 사람)로 살았다는 것, 그리고 평소 위기지학(자기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의 실천으로 기묘사화 이후 도학을 지향하는 조선 선비들의 학풍을 이끌었다는 것을 퇴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또 그의 아들인 성혼(成渾 1535~1598)은 10살 때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 우계(牛溪)에 와서 성장했으며, 17살이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병이 있어 대과를 포기하고 이후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1살 연하인 율곡 이이(1536~1584)를 벗으로 삼아 평생을 함께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사는 우계(牛溪)를 호(號)로 한 성혼은 “선비의 역할은 가정에서 몸을 닦아 천하 국가에 미치며, 장차 이 마음을 미루어 온갖 사물에 미치고자 하는 것이지, 오직 그 몸만 착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유교의 가르침이 ‘마음’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성혼은 자신을 수양하는 수기(修己)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안민(安民)을 통해 대도(大道)를 구현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선비가 수양해야 하는 것이 ‘마음’이었다.

 

우계 성혼의 집안은 사육신(死六臣)인 성삼문 이후 성담수, 성수침, 성수종, 성운, 성우, 성제원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은거자수(隱居自守, 숨어 살며 행동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함), 성현자기(聖賢自期 스스로 성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함)와 같은 은둔의 학풍이 있었다. 또 부친인 성수침과 숙부인 성수종, 스승이었던 백인걸은 모두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가학(한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오는 학문)과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이를 통해 이어받은 우계의 학풍은 자신의 인격적 완성을 지향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었다. 우계는 소학의 실천을 기초로 한 진심의 공부와 공경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

 

성혼은 평소에 정암 조광조와 퇴계를 사모하였으며, 위로 거슬러 올라가 주자(朱子)를 표준으로 삼았다. 이이(李珥)와는 교분이 두터웠다. 이이는 이황(李滉)과 성리학의 이기설(理氣說)에 대해 논쟁 중이었다. 성혼은 수차례에 걸쳐 이이와 토론하면서 이황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성혼과 이이의 학설논쟁은 퇴계 사후의 일이지만 성혼은 부친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함으로서 이름이 이미 나 있었고, 그의 부친 성수침은 앞에서 알아본 대로 일찍부터 학문을 하면서 스스로 가꾸고 이를 세상으로 확산시킨다는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고 있었기에 퇴계로서는 8년 위 선배인 성수침을 존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퇴계가 추구하던 학문의 길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기에 성수침이 세상을 뜨고 그의 아들 성혼이 묘갈을 부탁해왔을 때 이를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

 

그렇다면 이 묘갈을 퇴계는 언제 썼을까? ​

 

연구자들은 묘갈명에 쓴 퇴계의 관직명과 성혼에게 1570년에 보낸 편지를 근거로 이 묘갈은 고향인 도산으로 내려와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바쁜 시기인 1570년에 쓴 것으로 추정한다. 그때는 성수침이 세상을 뜬 지 이미 6년이나 지난 때였지만 비석에 새기려는 아들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 정성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퇴계는 묘갈에서 성수침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한다.​

 

선생은 키가 크고 골격은 맑고, 수려하며 풍채와 태도가 매우 거룩하였다. 충후하고 온화하여 기쁘고 성냄을 말과 웃음에 드러내지 않고, 말하고 웃는 것을 때에 맞게 하여 바라보면 엄숙하고 다가가면 온화하였다. 마음이 담박하고 맑으며 원대하여 세상 밖에 우뚝하였다.

 

젊어서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일찍이 조정암(趙靜菴)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그 학문은 처음에는 넓게 배우다가 《소학》ㆍ《대학》ㆍ《논어》에 절충하였고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모든 책에 두루 미쳤다. 손수 정자(程子)의 “함양(능력이나 성품을 기르고 닦음)에는 모름지기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진학(학문의 길에 나아가 배움)은 치지(사물의 도리를 깨닫는 경지에 이름)에 있다.[涵養須用敬 進學在致知]”라는 등의 말을 써서 앉은 곁에 걸어 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글을 읽다가 마음에 맞는 곳이 있으면 문득 흔연히 스스로 즐거워하여 말하기를, “성현의 글을 읽어야 바야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무궁함을 알게 된다. 오랫동안 글 뜻을 음미하며 한가롭게 학문의 진리에 잠겨 있으면[優游涵泳] 절로 상쾌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이를 물으면 대답하기를, “나는 아직 여기에 깨달은 것이 없다.” 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진실하고 평이하게 하여 행할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일찍이 감히 쓸데없는 말을 하여 후생을 그르치지는 않았다.​

 

퇴계는 일찍이 조광조의 학맥을 이어받아 벼슬이 아닌 학문과 실천의 길에서 위기지학을 추구한 성수침의 길이 곧 자신이 추구하던 목표와 같은 길이었음에 그의 일생을 나름 성실히 증언하면서 그의 값어치를 후세에 알린 것이다. 퇴계가 이 묘갈을 쓴 것이 1570년이 맞는다면 그 해는 자신이 세상을 하직하던 마지막 해다. 그런 상황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서 고인을 회상하며 묘갈을 써준 것이다.

 

 

안동에 살던 퇴계가 안동 외 다른 지역 인사들의 묘갈문을 써 준 것은 거의 없다. 그 전에 한양 독서당에서 인연을 맺은 파평 윤승홍(尹承弘) (1483~1568)의 묘갈문을 쓴 것이 있을 뿐이다. 이때 벌써 퇴계의 건강은 많이 나빠졌을 것이고 그해 12월에 눈을 감으셨다. 그런데도 율곡과 고봉 등의 관련 글들을 참고로 해서 성수침의 일생을 평가해준 것은, 상당한 배려이자 결심이 아닐 수 없다.

 

곧 성수침의 길을 잊지 말고 따라가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퇴계가 도산에 서당을 짓고 거기에서 생활하면서 생각하고 가르치고 글을 짓고 한 것의 선례가 곧 청송 성수침이라 할 수 있다. ​주희 이후 퇴계로 이어지는 도학자들이 생각해온 길을 청송 성수침이 먼저 갔고 이어 퇴계가 진정한 도학의 길로 넓혀주었다.

 

성수침의 아들 성혼은 율곡과 늘 사상을 같이하면서도 퇴계의 생각을 이해하고 감안하려고 애를 썼고 그를 통해 그 사상은 윤선도나 정약용 등 기호남인들에게 이어져, 노론 일변도의 사상독재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퇴계의 이 묘갈은 단순히 파주에 사는 어느 문인의 죽음을 평가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후대로 이어지는 큰 사상의 흐름에 작은 징검다리를 놓은 것이 된다.

 

 

퇴계의 이 묘갈문은 이미 퇴계집에 수록되어 있고, 2001년 퇴계탄생 500주년 기념 특별서예전에도 비석의 탁본이 출품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그 의미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기에 필자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우연히 친지를 통해 청송선생 묘갈문의 존재와 퇴계의 친필 비문을 직접 보게 됨으로써, 우리가 자칫 지나치기 쉬운 퇴계의 생각과 그의 글에 담긴 의미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당시 퇴계에게는 동인ㆍ서인의 구별도 없었고 노론ㆍ소론, 남인ㆍ북인의 구별도 물론 없었다. 오로지 진정한 학문이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그것의 실천과 보급을 위해 지혜를 다 드러내었고 자기 마을 친척이나 친지도 아닌 청송을 위해 묘갈문을 거부하지 않았다. 퇴계 사후 선비들은 퇴계와 율곡을 비교하며, 퇴계와 남명을 견주며 학문의 우열을 논하고 동인ㆍ서인, 남인ㆍ북인, 노론ㆍ소론으로 나뉘어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을 했다. 서로를 용납 못 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그 복상 문제로 논쟁하다 귀양을 가게 된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말한 것이 옳으면 잘못을 뉘우치고 전에 한 말을 고치면 될 것이요, 만약 내 말이 옳지 않으면 내가 어리석어서 의리를 모른다고 하며 한번 웃어버리면 그만일 것이네. 그런데 이처럼 시끄럽게 떠들면서 기필코 나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군자의 마음이겠으며, 내가 일찍이 예측이나 했던 일이겠는가." ... 고산유고 제4권 / 안생 서익에게 답하는 별폭 ​

 

이런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퇴계는 나중에 기호학파의 중심이 된 성수침의 묘갈을 통해 자신들의 출세를 위한 욕심을 버리고 진정한 학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중 숙종조 이후에 이르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인 후학들은 파주에 보낸 퇴계의 이 묘갈문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하지 않겠는가?

 

 

 

​현대의 우리는 여전히 동서 양 진영으로 나뉘어 학문으로, 때로는 사상으로 서로 반복하고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형상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것이지, 학문을 이유로 권력을 장악하고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것이 아니다. 공부의 목적은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멀리 파주에서 비석에 새겨진 퇴계의 마음을 다시 보고 싶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