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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영화 ‘하르툼’에서 배운다

국민의 정신이 중요하지만,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9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학교 2학년이던 1967년 내가 살던 충주의 거리에는 위의 사진과 같은 <가쓰므>라는 영화 광고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뭔가 엄청난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 배경이고 70밀리 대형 스크린이라 하니 궁금하기는 했지만, 당시 영화를 마음 놓고 볼 형편이 안 돼 아쉬운 영화로만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직장인 KBS에서 런던주재특파원을 하면서 영국인들의 세계진출 과정을 들여다보다가 찰스 조지 고든(1833~1885)이란 장군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은 곳이 수단의 하르툼(Khartoum)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보니 이게 그 영화의 제목이 말하는 <가쓰므>가 아닌가?

 

어떻게 하르툼을 이렇게 일본식으로 표기하였는지 씁쓸한 적이 있었다. (더욱 우스운 것은 3년 뒤 비디오테이프로 다시 나왔을 때는 제목이 '카슘공방전'이었음을 언론인 임철순 씨의 글을 통해 알게 됐다. 엉뚱하기는 이 제목도 마찬가지이다. 영어의 T가 SH로 표기된 것을 처음 본다) 1967년 국내 개봉된 이 작품은 이집트(배후에 영국이 있지만)의 지배를 받는 아프리카 수단 사람들의 독립투쟁을 다룬 70mm 대작 전쟁영화다. ​

 

"총독 관저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고든 총독은 비장한 표정으로 총독의 예복 정장으로 갈아입는다. 허리에는 사브르(saber)라고 부르는 번쩍이는 기마병용 긴 칼을 차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마음의 준비가 끝나자 한 손에는 군용 권총을 쥐고, 관저로 밀려오는 토민병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관저로 밀려들던 토민병들은 백인 총독의 위엄 있고, 의연한 모습에 일순 움찔하며 긴장했으나, 곧이어 그 가운데 한 명이 던진 창에 맞아 총독은 장렬하게 전사한다." ​

 

영화 '하르툼(Khartoum)'의 절정이다. 영국의 수단 총독인 찰스 고든(찰턴 헤스턴 분)은 1885년 1월 26일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알 마흐디(로렌스 올리비에 분)의 대군을 맞아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찰스 고든 총독은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을 제압한 공로로 수단에 가서 현지인들의 반란으로 곧 함락될 하르툼에서 유럽인들과 이집트인들을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영국을 위해서는 퇴각할 수 없다며 하르툼을 지키려다가 8천 명의 영국군과 함께 장렬한 패배를 맞은 것이다.

 

 

 

그로부터 만 140년이 지난 2023년 4월 25일 하르툼 주재 한국 대사관에 피신한 수단 교민 28명 전원은 우리 군의 보호로 800㎞ 거리인 포트수단으로 옮겨져 대피하다가 대한민국 공군의 C-130J 수송기 ‘슈퍼 허큘리스’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공항에 무사히 도착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우디의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는 과정은 생중계되기도 했다.


140년 전 이름도 모르던 멀리 이프리카 사막의 도시 하르툼이 이렇게 우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140년 전 하르툼은 외국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수단인들의 독립항쟁에 의한 것이었고, 이번의 하르툼은 수단 군벌 사이 무력충돌 때문이라는 상황은 다르지만 영국군 수천 명이 몰살한 하르툼에서 우리는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707 대테러 특수임무대, 공군 공정통제사(CCT), 청해부대 충무공이순신함(DDH-IIㆍ4400t급) 등 육ㆍ해ㆍ공 최정예 부대, 공군 수송기를 동원해 교민들을 무사히 대피시켜 격전장 밖으로 빼낸 것이다.​

 

더구나 이때 수단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대피하는 과정에서 한국군이 특히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일본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눈앞 총격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한국군이 일본인을 차량에 태워 수송해 줬다”라며 “한일 관계 개선이 현장에서 좋은 영향을 줬다”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 국민까지도 돌볼 정도로 우리 대한민국의 국력이 높아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역사로 보면 기적일 것이다. 140년 전 일본 등 외세의 입김에 휘둘리던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이제 자국민을 위해 멀리 군대를 파견해 그들을 무사히 구출해 낸 것이고 이웃 나라 국민의 대피까지 도운 것이다. 그야말로 작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기적적인 발전을 했고 그것이 국력으로 이어짐으로써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하르툼은 우리에게 문명사적 교훈을 준다.

 

하르툼의 역사를 보면 수단의 독립운동을 지휘한 알 마흐디가 고든 장군을 죽게 한 13년 뒤인 1898년,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하던 영국은 호레쇼 키치너 장군의 원정대를 보내어 알 마흐디의 후계자인 칼리파 압둘라를 수단 중동부의 옴두르만(Omdurman) 평야에서 공격한다.

 

수단은 그대로였지만 영국군은 달랐다. 수단의 민병들은 여전히 말을 달려 영국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영국군이 새로 개발한 맥심 기관총은 수백 미터 거리에서 불을 뿜으며 일 분에 6백 발의 총알을 수단군에게 쏟아 부었다. 결국 수단 민병 만 천명은 영국군 270미터 앞까지만 진출하고는 기관총과 소총에 무너져 몰사했고, 영국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13년 전 영국군 8천 명을 섬멸한 화려한 승리는 불과 13년 만에 처절한 패배로 돌아왔다. 신무기의 위력이 발휘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똑같은 영국군과 수단 민병대였고, 애국심이나 투지에 있어서는 어느 쪽도 문제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영국군들은 가만히 엎드려서 총만 쏘면 됐고, 수단 민병대는 말을 달려 돌격을 감행했지만, 총알받이로 모두 목숨을 잃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에 당시 전투가 끝나고 당시 종군기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장면을 다시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에 어느 무모한 바보들이 이런 전쟁을 치를 것인가?" 결국 신기술이란 것이 이처럼 무섭다는 것이다.​

 

1585년 부싯돌을 쇠에 부딪쳐서 발화시키는 소총이 나온 이후 인류는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 개발에 온 힘을 쏟아 부어 1836년 뇌관식 격발장치가 개발됨으로서 소총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862년에 최초의 실용적인 기관총이 개발됐고, 22년 후인 1884년에는 하이람 맥심(Hiram Maxim 1840~1916)에 의해 첫 전자동식 맥심 기관총이 발명되어 분당 600발을 쏠 수 있었다. 1885년 하르툼에서 고든 장군이 전사할 때는 이 기관총이 막 개발되어 미처 보급되지 않았으나 옴두르만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이 기관총을 본격 실전 배치함으로서 수단군을 철저히 궤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막의 도시 하르툼의 교훈은 바로 역사에 있어서 한 국민이나 집단의 정신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일 것이다. 세상은 바뀌고 있고 신기술은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우리가 정신적인, 도덕적인 깨끗함에만 가치를 두고 우리 국민의 마음을 그쪽으로만 몰고 갈 때에는 우리는 언제든지 신기술을 개발한 다른 집단, 다른 사람들에게 먹힐 각오를 해야 한다.

 

오늘날의 신기술은 제품 하나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효율적이고 저비용의 경제체제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더욱더 효율적이고 경쟁력이 높은 나라가, 다른 나라의 경쟁이나 추월을 뿌리치고 앞서나갈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다시 강국의 먹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