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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행주산성에서 정걸 장군을 새롭게 발견하다

78살에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워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2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번에 제가 몸담은 호산나 찬양대에서 행주산성에 다녀왔습니다. 해마다 한 번은 야외나들이를 하였는데, 그동안 코로나로 멈췄다가 이번 오래간만에 행주산성으로 야외나들이를 한 것이지요. ‘행주산성’ 하면 행주치마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왜적과 치열하게 싸우다 무기가 다 떨어져 가자, 여자들이 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지요? 그래서 이후 ‘행주치마’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말입니다. 사실 행주대첩 이전에도 ‘행주치마’라는 용어는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행주대첩의 승리에 취해 이를 떠벌리다가, 행주산성의 ‘행주’와 행주치마의 ‘행주’가 같으니까, 행주치마도 여기서 유래된 것 아니냐는 지레짐작으로 유래가 와전된 것입니다. 그럼 ‘행주치마’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요?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행자승이 절에서 일을 할 때 두른 치마를 ‘행자치마’라고 하다가 ‘행주치마’가 되었다는 것을 유력하게 봅니다.

 

그리고 행주대첩을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아울러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한다는 것도 잘 아시지요? 그런데 ‘대첩’이라면 적을 크게 이긴 승리를 말하는 것인데, 사실 행주대첩은 크게 이긴 것은 아니지요. 객관적으로는 아군보다 8배에서 10배 많은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왜군을 가까스로 물리친 승리이니까요. 그래도 절대적 열세의 병력으로 승리한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대첩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그런데 임진왜란 때 이보다 더 크게 이긴 전투도 많은데, 왜 이들 전투만을 3대 대첩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단순한 큰 승리보다는 전쟁의 중요한 고비에서 승리하며 흐름을 바꾸었다는 데서, 대첩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산도대첩의 경우에는 일본 수군이 서해로 올라와 북상하는 일본 육군과 양동작전을 벌이는 것을 좌절시켰고, 진주대첩은 호남으로 들어오려는 일본 육군을 무찔러 호남의 곡창지대를 보존할 수 있었다는 데서 대첩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행주대첩에서는 이 승리로 왜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어 왜군을 남해안으로 철수하게끔 한 데서 3대 대첩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번에 호산나 찬양대가 행주산성으로 간다기에, 새삼 행주산성과 행주대첩에 대해 좀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정걸 장군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정걸 장군은 임진왜란 때 조방장으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군으로만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정걸 장군이 이순신 장군보다 후배 장수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정걸 장군에 대해서는 이런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이번 행주대첩에 대해 자료를 찾다가 정걸 장군이 행주대첩에도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충청 수사이던 정걸 장군은 행주산성 전투가 며칠간 이어지면서 무기가 떨어져 갈 때, 경기수사 이빈과 함께 판옥선에 화살을 잔뜩 싣고 한강을 거슬러 행주산성으로 왔더군요. 그러자 이순신 장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왜군은 조선 수군을 보자 당황하며 협공에 당할까 봐 철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걸 장군에 대해 새로운 전공도 알게 되면서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정걸 장군의 나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장군의 나이가 몇 살이었을 것 같습니까? 무려 78살입니다! 와! 78살의 노인이 전쟁에 참전하다니요!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확인하였습니다. 지금도 78살의 노인이 전쟁에 참전한다면 화젯거리가 될 텐데, 그 당시 78살의 노인 장수라면, 삼국지에 나오는 황충 장군(75살)보다도 더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임진왜란 당시 정걸 장군의 나이를 알고 놀랄 수밖에요.

 

정걸 장군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전라좌도, 우도 수군절도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두루 역임하고 은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591년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 임명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추천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그전까지 북방에서 주로 활약하여 수군의 경력이라고는 1580년 발포 만호로 임명되어 1년 6개월간 복무한 경력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수군의 경험이 많은 백전노장인 정걸 장군을 추천한 것인데, 정걸 장군은 흔쾌히 새까만 후배인 이순신 장군 휘하에 일종의 참모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얼마나 새까만 후배인가 하면, 정걸 장군이 무과에 급제했을 때 이순신 장군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습니다.

 

그 나이에 새까만 후배 밑으로 들어간다? 그것만으로도 정걸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어납니다. 정걸 장군은 어떻게 그 나이에 다시 현역에 복귀할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는 이미 왜군이 침략할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을 때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정걸 장군은 오직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계급장 생각하지 않고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 것이군요.

 

이렇게 현역에 복귀한 정걸 장군은 이순신 장군에게 여러 수군 전략을 조언하였고, 판옥선 만드는 데도 도움을 주었으며, 직접 옥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의 전선에도 뛰어들어 전공을 세웠습니다. 정걸 장군 나이에 전장을 돌면서 활약한 장수가 정걸 장군 말고 또 있을까요? 아마 한국 역사를 통틀어 최고령 장군이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걸 장군은 조방장을 떠나 충청 수사로 있으면서도 이순신 장군이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달려갔습니다.

 

정걸 장군은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 83살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숨을 거둡니다. 그렇지만 왜군을 완전히 물리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기에, 하늘나라에서도 조국을 도우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들이 비겁하게 전쟁을 회피하지는 않았겠지요? 아들 정연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전북 고창군에서 활약하였는데, 1598년 흥덕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78살에 나라를 위해 다시 현역에 복귀하여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할 만한데, 그동안 정걸 장군에 대해서는 충분히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이런 정걸 장군에 대해 알게 된 전남 고흥의 향토부대인 7391부대 제2대대는 2015년에 ‘정걸 대대’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네요.

 

 

이왕이면 앞으로 새로 취역할 해군 함정에도 정걸 장군의 이름을 붙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은 이런 정걸 장군에게 반하여 장군에 대한 자료를 샅샅이 훑고 정걸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 답사도 다녀온 뒤, 2019년에 《80 현역 정걸 장군》이란 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정걸 장군! 임진왜란 때 78살의 나이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싸운 장군을 다시 생각하면서 기분 좋게 제 글을 마무리합니다.